예술경영자의 눈으로 본 연극 <마우스피스>








예술경영자의 눈으로 본 연극 <마우스피스>


"연극의 역할 중 하나는 삶을 비추고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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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당사자의 이야기는 어디 있는가.


연극의 제목이자 리비의 희곡 <마우스피스>는 악기 등에서 ‘입을 대는 부분’이자 ‘대변자’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촉망받는 극작가였던 리비는 가난한 예술가 데클란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글을 쓴다. 자신의 글이 세상에 파장을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누군가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그들과 함께 살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그들의 목소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을 100%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 일일까.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은 타인일 뿐이다. 나는 나의 입장으로 살아왔을 뿐, 완벽한 그 사람이 되어본 적은 없다.




원작자 키이란 헐리는 “어떤 사람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리고 싶었다”고 작품 의도를 설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당사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나의 시선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어떤 이야기든지 한 단계를 거치면 반드시 변형이 일어난다. 이야기를 전하고 전달받는 과정에서 왜곡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는 진짜 내 이야기일까.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진짜 내 목소리일까.




그렇다면 모든 예술은 오직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술가의 영웅 심리


소수자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일은 예술 분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이다. 흔히 예술가들은 잊혀진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준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고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가가 소수자를 소재로 삼을 때 그들을 대상화하는 것도 너무 쉬운 일이다. 리비의 희곡도 마찬가지다. 리비는 그 희곡을 통해서 데클린에게 불쌍한 프레임을 씌우고 데클린을 대상화하고 말았다. 가정폭력과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천재 예술가 데클란의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불쌍하지 않다. 데클란도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지 않으며,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동정받을 이유도 없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가 있잖아.”



“아니요. 어떤 사람들에겐 그냥 삶, 그것 말곤 없는데요...”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멋대로 재가공할 권리가 있는가. 그들의 입장을 어디까지, 어떻게 대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예술가라는 이유로 수많은 데클란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까. 데클란을 설득하는 리비의 모습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위압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내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은근히 풍긴다,




예술가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자신의 예술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착각. 분명 예술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한 번의 예술과 프로젝트를 했다고 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예술을 한다는 것을 권력 삼아 다른 이들에게 으스대고, 멋대로 행동하는 영웅 심리를 버려야 하지 않을까.



-예술과 가난


‘예술은 가난을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가난을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일까? 순간의 위로는 달콤하지만, 환상이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은 암울한 현실이다.




"리비를 따라가다 보면 '나쁘다'라고 생각이 든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술가의 한계인 거예요. 퓰리처상을 받지만, 사진 속 비참한 현장은 구하지 못하잖아요. 배우도 마찬가지예요. 소외된 아픔을 연기하고 감동을 자아낼 수 있지만, 상황을 해결하긴 어렵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는 거예요. 정작 소외된 분들은 극장에 오지 못하잖아요. 예술을 하는 우리 모두의 딜레마예요." _ 배우 김여진




엄밀히 따지면 예술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 아니다.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자신의 내면과 이상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자들의 것이다. 그런데 예술이 가난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어준다고? 진짜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 예술을 접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까. 리비의 말처럼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정작 모두가 예술을 즐기지는 않는다.












글/제작: 예술도서관TA 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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