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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셰익스피어>,위대한 극작가의 삶과 태도

우리가 몰랐던 셰익스피어 이야기


예술도서관 서평 – <우리들의 셰익스피어>
 

안치운 · 호영송 지음 (책세상)
· 별점: ★★★★★

· 난이도: ★☆☆

ⓒ 예술도서관


2021.03.03.     

나만의 제목창작 : 셰익스피어와 한국연극

나만의 부재창작 : 연극을 사랑하는 두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우리들의 셰익스피어> 책세상



  예술도서관 추천

  내가 붙혀본 ‘셰익스피어와 한국연극’이라는 제목처럼 이 책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수용과정 속에서 한국연극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이해랑, 장민호, 유치진 등 굵직한 연극계 원로 인사들의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이 1962년 남산의 드라마센터의 개관공연으로, 그리고 이 전에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였던 대구에서 공연되었던 사실을 통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한국연극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치운 교수의 파트를 보면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셰익스피어 극이 어떤 식으로 국내에 도입되었는지 알 수 있는데, 여기서 가장 크게 느낀 부분은 그 힘들던 시절에도 연극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지켜온 선조들의 모습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해방 직후 분단과 함께 찾아온 아픔 속에서도 연극은 항상 살아있었다. 특히 각 대학교에서, 특히 영문학과 학생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부하고 공연으로 올리는 것에 있어 큰 즐거움을 느끼던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아름답고 이상적인 대학 동아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싶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와 같은 관련된 도서들을 읽으면서 또 새로운 사실과 영감을 얻게된다.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흥미로운 영감은 <햄릿>의 셰익스피어와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가 같은 날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신기한 이 우연은 언젠가 나에게 글감으로 작용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책에서도 말하듯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고전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어쩌면 연극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면 책에서 인용한 김 한 교수의 말처럼 고전과 희곡, 그리고 연극이 전해주는 가슴 뛰는 감각적인 선물을 받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찔할 따름이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내 인생에서 허락해주신 가장 가슴 뛰는 감각적인 선물이었다.”     




키워드 정리

셰익스피어의 도둑맞을 뻔한 명성

2. 연극계의 큰 별 이해랑, 장민호

3. 셰익스피어와 함꼐한 한국 연극


<목차>

1964년은 특별한 연극의 해였다.

셰익스피어는 언제까지 위대한 작가인가?

셰익스피어는 신앙인이었나?

셰익스피어에 사로잡힌 영혼

비극작가의 희극의 가벼움

<햄릿>이 존재하는 방식

영국인에게 내린 축복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저녁

욕망이라는 이름의 정치, 혹은 정치라는 이름의 욕망

한국 연극이 세계 속의 큰 무대에 오르는 길

‘이아고’를 새총으로 쏜다, 배우를 권총으로 쏜다

이제 그 바다 앞에서 말한다

천재 극작가 체호프가 꽃 히던 이야기와

셰익스피어의 품에서 천직을 찾은 이들

     

2부 안치운

한국 연극의 셰익스피어 수용

일제강점기 시대

1945년 해방 이후, 대학 중심으로의 셰익스피어

리얼리즘과 셰익스피어

변용과 수용의 셰익스피어

1980년대, 정치극으로서 셰익스피어 수용

서구 연극 및 이론의 수용과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

결론: 셰익스피어와 함께한 한국 연극        



  

0. 프롤로그  

    

p21
명동의 극장 건물은 세월이 흘러 다른 기업체에 매각되어 사용되다가, 이를 다시 사들여 명동예술극장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이 복원 사업은 2009년 6월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었고, 취지대로 공연예술 본연의 사업에 역점을 두고 운영되고 있다.

   다시 1964년의 연극계로 돌아가자.
   1964년이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이라는 것은 이미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것이 실효 있는 공론으로 일어선 것은 바로 여석기 교수의 집에서 열린 연극을 살아하는 젊은 학생들 모임에서였다. 여 교수의 셰익스피어 사랑은 그냥 혼자 아끼고 좋아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p57
”셋이 한번 해봅시다!“라고 하던 추 씨의 음성은 아직도 내 마음 갈피에 남아 있다. 송 형과 나는 동국대였고 추 씨는 중앙대였는데, 그는 그런 학벌도 염두에 안 두었다. 젊은 순수와 작가가 ”지르르“하고 통했다. 나는 지금도 그런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연극의 길을 가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있다. 나는 예민한 시심도 잃고 같이 극단 한번 해보자는 근사한 제안도 군대에서 ‘썩느라고’놓친 셈이다. 시와 연극, 이것은 나의 큰 맹세였고 400년 전에 태어난 어떤 사람도 바로 시와 연극을 부여안았다! 나에게 남모르는 훌륭한 고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셋 중에 혼자 살아서 이 글을 기록하고 있다.



  

 

p.78
 연극은 조직의 힘을 갖는다. 이것은 미묘하다. 희곡은 혼자 쓸수있지만 그 희곡은 공연을 거쳐 연극 행위로 진행되고 완결된다. 여기에서 바로 연극 특유의 힘이 나올 여지가 생긴다. 셰익스피어의 극단은 9명 정도의 인원이었다고 알려진다. 극단을 대표하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셰익스피어는 여러 역할을 수행했겠지만 바로 자신도 극단 조직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는 바로 조직원 사이에 주고받음이 원만하고, 서로 화합과 협조가 잘 되는 조직체를 셰익스피어가 이끌었다는 학인을 하게 된다.          




 

p97

이미 이 글에서 인용한 <한여름 밤의 꿈>에도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극작가는 자기 뜻대로 쓴다지만 그것을 와서 보아줄 민초 또는 관깨들의 마음을 철저히 자기 마음속에 들고 있어야 하는 입장이다. 소신을 가지고 쓴다고는 하지만, 작가의 마음 속에는 ‘갑’인 관객이 있고 그는 ‘을’인 작가인 것이다.        

  




p134

 김동훈의 일인극 <롤라 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추송웅의 일인극 <빨간 피터의 고백> 공연보다 여러 해 앞선 이벤트였다. 이때 일인극을 하는 입장은 “안 오는 관객을 찾아가는 연극”을 하자는 것이었다. 전용 버스에 소수의 공연 팀을 싣고 현장으로 찾아가는 "이해랑의 이동극장"도 학문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다시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 연극은 필롬 속의 평면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영화와 달리, 살아 있는 배우들의 플레이기 때문이다.                                   





p138

"그런데 오늘 학생들 3개 팀의 <청혼>을 보니까, 이게 지금 우리들이 본 그대로, 마치 다른 작가가 쓴 작품들을 본 것처럼 다른 느낌을 주잖아요? 같은 희곡을 가지고 만든 것인데도 어느 작품은 막 웃게 되고, 어느 작품은 좀 점잖고, 어느 작품은 좀 덜 무거워지고! 바로 이거예요. 연출이 이런 거고, 연극은 이런 거예요. 연극 연출이 무엇인지를 이해 못 하는 그 예술원 회원들한테 보여주고싶군요. 하하하."    





p195

이러한 방식의 ‘셰익스피어 알아가기’는 일본 서재극(書齋劇)(무대 상연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읽을거리로 쓴 극. closer drama. 레제드라마라고도 한다)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한국 연극 유입은 셰익스피어를 공연보다는 문학적 연극 대상으로 먼저 여겻다. 그 결과 셰익스피어는 공연보다는 문학적 대상으로 더 크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p202

‘민중계몽’의 신파극은 실상 일제 연극 양식의 아류에 머물고 말았다. 대중들의 열광에 호응했던 신파극으 곧 상업화되면서 ‘스타 시스템’의 영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신파극은 점차 인기몰이에 급급해지고 상업 연극으로 안착되었다. 신파극은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을 중시하는 극으로 변모하였고 연극의 의의나 목적의식은 사라지고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는 대중오락물로 전락하게 되었다.     





p220

대학생들이 연극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접하는 것은 쟈체로도 즐거움이 있었고, 원어로 연기를 하는 것은 언어 공부와 더불어 그들에게 큰 매력이 되었다. 서양 문물로의 연극 양식 실천, 문학적 활동으로서 무대와 대사, 그리고 의상과 조명 등이 그 효과를 더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관객 앞에서 발표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교육적 장점으로 증명되었다. 대학에서 공연은 연극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연극이 아카데미적으로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에는 대학 캠퍼스에 셰익스피어 열풍까지 일게 된다. 영문학도라면 청바지 뒷주머니에 둥글게 말린 대본이 자랑이었고, 개강과 동시에 너도나도 갈고닦은 대사연기를 선보이고자 했다.   




            

MEMO LIST

*작가소개

호영송

1962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해 이해랑 선생에게 배웠다. 1946년 고려대학교 여석기 교수의 제의로 열린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 축제"에서 연극학도로서 <맥베스 발췌극>을 공연했으며, 이때부터 셰익스피어에 사로잡혀 한국 연극의 도약을 기원했다. 선배 송성한과 '문예극장'을 조직, <패스포드와 거짓말>로 문공부 주최 '신인예술상 경연대회'에서 특상 작품의 주역을 맡았다. 추계예술대학에서 희곡을 강의했다. 대학 시절부터 기성 시인들과 함께 <60년대사회집>동인 활동을 했다. 1973년 당시 문제소설 <파하의 안개>를 계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이후 소설가, 평전작가, 방송작가 등으로 활동했다. 1960년 4·19 당시 동성고등학교 데모 결의문을 썼고, 2019년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안치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국립 파리 소르본누벨대학교 연극연구원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신문 편집기획위원, 삼성문학상과 대산문학상 심사위원, 프랑스 소르본누벨대학교와 브장송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호서대학교 예술학부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연극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추송웅 연구⟫, ⟪공연예술과 실제비평⟫, ⟪한국연극의 지형학⟫, ⟪연극과 기억⟫, ⟪연극, 기억의 현상학⟫, ⟪연극비평의 미래⟫,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등이 있다.     


*이해랑

니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귀국하여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를 거쳐 연극이론 및 극단운동을 펼치고 1950년 봄 국립극장 설립과 함께 창립된 극단 신협의 모태를 세웠다. 전쟁중에도 연기생활과 함께 연출도 겸하기 시작했다. 예술원 발족과 함께 30대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59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후 드라마센터 개관과 함께 극장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내고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주로 국립극단의 연출을 맡고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는 등 문화예술인사로 활동하였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셰익스피어 - <햄릿>,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 <줄리어스시저>,<한여름 밤의 꿈>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함께 보면 좋은 영화 -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글/제작:  ⓒ 예술도서관 에디터 박두환

*책을 지원해주신 출판사 <책세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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