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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tPD Aug 05. 2020

기대감 없는 휴가

무결정으로 무결점에 가깝게

#예능 PD에게 휴가란

예능 PD 하는 일은 보통 1주일 단위로 돌아간다. 정해진 방송일에 맞춰 기획, 촬영 또는 녹화, 편집, 종합편집, 방송본 입고. 이런 싸이클로 1주일이 돌아간다. 요즘에야 시즌제로 10부작, 16부작짜리 예능도 만들어지지만 예전에는 한 번 만든 포맷으로 몇 년씩 해 먹었으니(?) 그야말로 뺑뺑이 치는 삶이었다. 지금은 주 52 시간 근무 제도까지 잘 운영되고 있어서 라떼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갈아서 만드는 것이 프로그램인데, 만약 한 사람이 빠진다? 그 사람이 말아오는 책임지고 만들어오는 것을 말아온다는 표현을 쓴다 분량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데 이것이 또 못할 짓이다. 자기 분량도 날밤 새고 허덕이며 만드는데 엎어치기로 들어오는 덤 분량에 몇 사람은 피똥을 싸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휴가라는 것은 1년에 1번 1주일 정도 선에서 합의 아닌 합의가 이루어진다. 모두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휴가를 가기 위한 암묵적인 룰인 셈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평생에 한 번 있는 신혼여행. 요즘은 두어 번 가는 사람도 있다만 신혼여행의 경우는 2주일 정도를 다녀와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휴가 출발일 7.29일 날씨 상황. 절묘하게 경기도에 비 구름이 없었다.

#휴가 계획 feat. 코로나, 장마

이번 여름휴가는 새로운 것이 많았다. 우선 몸이 조금 불편한 상태라는 점. 코로나 때문에 외국에 나가지 못한다는 점. 글램핑이라는 걸 도전했다는 점. 


우선 몸이 온전치 않으니 장거리 이동은 삼가고 숙소는 경기도 이천, 용인으로 잡았다. 안 막히면 서울에서 1시간 반 거리다. 그리고 비 소식이 있어서 더욱 몸을 사렸다. 결론적으론 비를 피해 다닌 훌륭한 위치 선정이었다.


가성비를 엄청 따지는 아내 덕에 직업이 회계사 이천 미란다 호텔 1박 + 워터파크 패키지를 싸게 구입했다. 그리고 이천에서 멀리 가지 않기 위해 근처의 글램핑장을 알아보다가 용인 쪽에 수영장이 있는 철이네 캠핑장을 예약했다. 캠핑도 글램핑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최대한 준비물 없이도 갈 수 있는 곳을 고르고 골랐다. 


#기대감 없는 즐거움

숙박만 예약하고 거의 무계획이었다. 2박 모두 수영장을 끼고 있는 숙박을 잡은 것은 딸내미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고 그 외 관광 코스나, 맛집 검색 같은 것은 미리 하질 않았다. 철저하게 힘을 뺀 휴가랄까? 모든지 그렇다. 기대감이 적으면 만족감이 커진다. 잘 만들어진 예고를 볼 수록 오히려 영화의 만족도가 떨어지듯이 말이다.


- 숙소 근처에서의 첫 끼니 "랑토스레"

레스토랑을 거꾸로 읽은 랑토스레는 이천에서 꽤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운 좋게 이천 미란다 호텔 근처에 위치해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런 얘기 하면 좀 재수 없겠지만 서울에선 이 정도 맛의 레스토랑은 흔하다. 다만 이천 쌀밥 한정식의 도시에서 이런 파스타와 퓨전 양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훌륭한 것이다. 숙소 근처에 있었으니 발품도 팔지 않았고 노력 없이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숙소 패키지에 포함된 "별빛 정원 우주"

숙소에서 무료 티켓을 줘서 밤에 할 일도 없어 다녀온 곳. 덕평 휴게소 뒤편에 자리 잡은 관람회? 전시장? 루미나리에? 딱히 정의를 내리긴 힘든데 LED 조명으로 정원을 이쁘게 꾸며놓은 곳이다. 별빛과 우주를 테마로 하고 있는 듯하다. 나가기 싫다는 아이를 데리고 나갔는데 막상 가보니 아이가 더 좋아했다. 공짜라서 역시나 만족스러운 관람. 


#아이의 즐거움

6살 딸아이가 가장 즐거워하는 놀이는 단연 유튜브 시청이다. 패드를 쥐어주면 두세 시간 순삭이다. 아이는 만족스럽지만 그야말로 킬링 타임이다. 내 아이이의 소중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다는 점에서 부모의 죄책감이 너무 크다. 그나마 밖에 데리고 나가면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이 쌓여 아이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게 믿는다.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야외 활동은 물놀이다. 수영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저 구명조끼를 입고 물에 둥둥 떠서 물장구치는 것뿐이지만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쉴 새 없이 즐겁게 논다. 다만 아빠를 닮아서인지 한 번 시작하면 도무지 쉬지 않고 달리기 때문에 서너 시간 놀면 체력이 방전되어 방으로 가자고 한다. 방전되어도 더 놀렸다가는 여름 감기를 앓기 일쑤다.


한 달 전에는 홍천에 있는 오션월드를 갔다가 어트랙션을 체험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키가 120cm 이하인 경우에 즐길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른들을 위한 워터파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이 눈높이에 맞는 작고 얕은 물놀이장을 찾았다. 가격적으로도 저렴해서 이득


#무난했던 글램핑 첫 도전

여름의 끈적거림, 벌레, 열대야를 좋아하지 않는 부부이기에 야외 활동은 꽤나 버거운 도전이었다. 그나마 아이를 위한 마음으로 절충안을 찾은 것이 글램핑. 정확히 뜻은 모르겠으나 내가 이해하기론 글램핑이란 캠핑의 일종인데 냉난방, 샤워, 화장실 등의 환경이 다 갖춰져서 맨몸으로 가도 되는 "편리한 어떤 것" 같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용인에 위치한 철이네 캠핑장은 럭셔리한 곳은 아니지만 있을 건 다 갖추고 있는 글램핑장이었다. 선택 포인트는 가운데 어린이가 놀기 좋은 수영장이 있다는 점. 숙소 텐트에서 수영장이 한눈에 보이는 판옵티콘 구조라는 점에서 부모 마음 안정 점수 획득. 합리적 가격. 친절한 서비스 후기 등의 여러 포인트가 있었다. 다행히 사장님도 친절하고 시설도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글램핑에 대한 좋은 첫인상을 갖게 되었다.


아내가 펜션이나 글램핑 같은 숙박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침구류 세탁 여부가 크다. 호텔의 각 잡힌 침대 세팅을 보아야 안심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하얀 리넨 천에 대한 신뢰감과 막연한 동경이랄까? 펜션이나 글램핑 같은 경우 리넨이 아니라 가정용 이불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세탁 여부를 확인하긴 어렵다. 이건 베갯잇 세탁 여부만 체크하고 안심하는 정도로 양보하기로. 다행히 베갯잇은 세탁된 듯했다.


맨몸으로 가도 될 정도로 모든 게 다 있었다. 캠핑을 자주 다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짐을 싸는데 하루가 다 가고 짐을 풀고 정리하면서 부부싸움을 한다고 한다. 장비를 잘 챙기고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며 맥가이버 같은 만능 부모가 되는 것이 캠핑의 묘미이고 부심이지만 우리 부부처럼 나약한 체력과 박약한 의지를 가진 위인들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구워 먹을 소고기, 소시지를 사고 라면, 과자, 음료, 물 정도를 쟁여가는 것도 힘겨운 문제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 너무 다르다고 남은 인생을 어찌 맞춰 사냐고 농담하지만 사실 "귀차니즘"은 너무도 닮았다. 


여름 글램핑의 특장점은 에어컨에서 빛났다. 모기와 날벌레로부터 안전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시원한 에어컨까지 틀어주니 여느 호텔방 못지않은 쾌적함을 선사했다. 특히 잠자리가 바뀌고 적정 온습도가 유지되지 않으면 새벽에 발길질을 하는 우리 딸내미 덕분에 걱정을 많이 했으나 02시 04시에 한 번씩 깬 정도면 매우 선방한 편이다. 에어컨 없는 여름밤 취침은 아직 도전하기 힘든 숙제다. 


https://nabimovie.tistory.com/entry/%ED%95%9C%EA%B5%AD-%EC%98%81%ED%99%94-%EB%AA%85%EB%8C%80%EC%82%A

#최소한의 계획의 경쾌함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가 있다. 머리 질끈 싸매고 철저하게 짠 계획이라도 그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실망감이 더 크고 임기응변으로 헤쳐나가지 못하면 결국 계획은 무쓸모라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맞고 어느 정도 틀린 이야기다. 


유출된 무한도전 구성 대본

몇 년 전인가? 십 년 전인가? 무한도전 대본이 유출된 적이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무슨 대본이냐며 가짜라고 얘기하는 사람들과 아무리 그래도 대본이 있지 않겠냐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격돌했다.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대본은 있다. 반드시 있다. 기필코 있다. 다만 드라마 대본과는 다른 성격의 대본이다.


예능에서 대본이라 함은 대본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구성안이라고 한다. "촬영 계획"이다. 대사 같은 말들이 쓰여있어서 저대로 읊는 거냐며 혀를 끌끌 차며 그동안 속았다는 사람도 있겠다만 실제 방송을 보면 저 대본으로 찍은 게 맞나? 생각할 정도로 진행과 결말이 다르다. 예능 구성안은 연출팀의 밤샘 회의를 통해 나오게 되는 그야말로 연출팀 머릿속에서 나온 뇌피셜 스토리다. 이러 이런 곳에서 이러 이런 게임이나 미션을 수행할 것이고 평소 출연자의 언행 습관에 맞게 가상으로 써놓은 계획서인 셈이다.


저걸 완전히 숙지하고 오는 출연자도 없을뿐더러 그걸 권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떤 것을 화면에 담으려고 하는지 서로 생각을 공유하는 정도에 그친다. 박명수, 노홍철 같은 분들이 저대로 행동을 할리도 없고 외워 올리도 만무하다. 다만 출연자와 함께 합을 맞춰야 할 백여 명 가까운 스태프들이 뭘 하는지는 대충 알아야 하기 때문에 가상의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무한도전 <돈가방을 들고 튀어라>

무한도전의 전설인 <돈가방을 들고 튀어라>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본으로 쓸 수 있지도 않고 그대로 따라 할 경우 연기 톤이 다 드러날 것이다. <무한도전> <1박 2일>등의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프로그램들은 장소, 상황을 설정하지만 세세한 스토리는 출연자들이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듯 예능의 재미는 대본대로 하지 않을 경우에 폭발한다. 시청자들은 이런 날그림에 더욱 열광한다.


# 여행은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이번 여행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최소한의 설정을 했다. 물놀이장이 있는 이천, 용인 숙소를 정해두고 아빠, 엄마, 딸내미 세명의 출연자가 자유롭게 스토리를 이어나갔다. 물론 여섯 살 딸내미는 까다로운 출연자여서 어르고 달래서 끌고 다녀야 했다는 점. 물놀이 분량이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 지역색이 묻어나는 먹방이 아니라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먹방이었다는 점. 화려한 볼거리보다는 소소한 일상 다큐 같은 느낌이었다는 점. 큰 반전이나 빅재미를 안겨주진 못했다는 점에서 시청률이 잘 나온 레전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한도전도 모든 편이 시청률이 잘 나오진 않는다.


해외여행이 막힌 시점에 자연스럽게 국내 여행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국내 여행의 장단점은 낯선 듯 낯설지 않고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편안함과 셀렘 중간쯤 있다. 큰 계획과 기대감을 갖고 가는 해외여행과 다르게 무계획, 무기대로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식인 것 같다. 아무 기대 없이 찾아간 곳에서 뜻하지 않은 무지개를 만난 것처럼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https://www.insight.co.kr/news/250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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