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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tPD Jun 30. 2020

퇴사와 불닭볶음면

같은 듯 다른, 두 개의 유행상품

교보문고에서 퇴사로 검색하면 관련 국내 도서는 537권이나 나온다. (2020년 6월 29일 기준) 퇴사는 유튜브, 영화, 드라마, 웹툰 등에도 자주 등장하고 또 인기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퇴사는 요새 핫하게 잘 팔리는 상품이다. 이와 유사한 상품이 또 있는데 바로 불닭볶음면이 있다. 현재 유행 중이고, 자극적이고, 도전하고 싶어 진다. 매운맛을 잘 참고 이겨내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만 이겨내지 못한다면 눈물, 콧물을 쏟고 위장병까지 얻게 되는 것이 흡사하다. 


나는 지금 K본부 예능 PD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이 자리에 오기 위해 퇴사를 두 번 거쳤다. 첫 직업은 S카드사의 상품개발팀 팀원(1년 7개월), 두 번째는 지역 방송국 PD(2년 5개월)였다. 누구만큼이나 퇴사의 어려움과 그 설렘을 잘 알기에 퇴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항상 돌아오는 월요일 출근길,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퇴사다.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고 그냥 넋두리를 하며 꾸역꾸역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중엔 단순히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저한 자기 분석을 통해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 특성상 제대로 된 직업교육이나 탐방의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런 소모적인 방황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이런 경향은 사회 초년생들에게서 뚜렷하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회사를 한 번 이상 옮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력 1년 차인 신입사원의 이직 경험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 이상이 ‘이직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기사 출처: https://www.zdnet.co.kr/view/?no=20200427093051




당신이 용기 내어 일단 퇴사를 행동에 옮기면 다음 행보가 뭐냐에 따라 퇴사의 이유가 나타난다. 


1. 퇴사 후 동종 업계로 이직하는 경우

이는 급여 인상, 직급 승진, 처우 개선, 더 나은 복지, 발전 가능성 등 경제적 문제가 주로 대부분이다. 간혹 직장이 집에서 멀어서 이직하는 경우 또는 근무시간 과다 등도 있는데 "시간=돈=건강"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이것도 경제적 이유로 볼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동종업계 이직 이유는 인간관계다. 현재 직장에서 직장 상사, 동료와 궁합이 맞지 않을 경우 매우 중요한 퇴사 사유가 된다. 부서가 세분화되어있는 대기업의 경우 부서를 옮기는 선에서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규모가 작아 부서의 구분이 모호할수록 이런 퇴사는 많아진다. 


이런 경우는 현재 몸 담고 있는 업종과 업무는 만족하나 경제적, 심리적 조건이 더 나은 회사로 가기 위한 퇴사이다. 이런 퇴사는 이해득실이 명료해서 결정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동종 업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 현재 회사보다 좋은 조건의 회사에 대한 리서치는 체득되어있기 때문이다.


2. 퇴사 후 타 업계로 이직하는 경우

이 경우는 현재 회사는 만족하나 업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둘 다 맘에 안 드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가 그랬다. 첫 직장이었던 S카드에서 금융권답게 급여, 복지, 처우 등은 맘에 들었지만 업무가 도무지 재미도 없었고 손에 들어오질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0.001% 수익을 내기 위한 카드 상품개발이라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0.001%도 사실 큰 수익이었다. 하루하루 덧없고 허송세월 하는 느낌이 밀려왔다. 높은 급여에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하던 직업의 만족도가 너무 떨어졌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나는 사실 PD가 되고 싶었다. 00학번으로 입학해서 2007년 2월 졸업을 앞두고 방송사 공채 시험에 차례차례 낙방했다. 방송사를 쌈 싸 먹는 서연고가 아닌 2군 대학 출신으로 나름 그 해 졸업생 중에 2차 면접,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던 나였기에 그 실패감이 더 컸다. 이때 내 자존감은 바닥이 났고 사회적 낙오자가 될 것 같은 조바심에 해서는 안 될 것을 했다. 바로 소중한 내 인생과 타협을 본 것이다. 


"이쯤 하면 충분히 해본 거 같아" 

"이 회사도 좋은 회사인걸"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보지" 

비겁한 자기 연민과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변명은 금세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S카드에 1년 7개월을 다니면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재수도 안 해본 나였기에 퇴사를 결심하기 위해 주변에 친구,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여자 친구(다행히 현재 와이프)와 가족에게 내 뜻을 알렸다. 물론 나 스스로도 퇴사에 대한 답을 내려야만 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퇴사의 이유 10가지였다. 그 당시 어느 책에선가 뭔가 결정하기 위해 10가지 사유가 있다면 해도 좋다는 내용을 봤던 것 같다.  하나하나 기억이 나진 않지만 10가지 이유는 금세 써 내려갔던 것 같다.


그렇게 퇴사를 했는데 2007년 세계를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해 방송국 문이 엄청 좁아진 상태였다. 공채를 하네마네 인원을 줄이네마네 풍문이 돌았다. 악조건 속에서 M본부, E본부에서 몇 단계 올라갔지만 결국 M본부 지역사에 입사해서 2년여간 PD로 일하다가 2011년 K본부 경력 공채로 입사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노력과 운의 조합이다. 

유현준 건축가의 와 닿는 명언. 보자마자 캡처했다.

지나고 보면 돌고 돌아 지금 일을 하고 있지만 저 길을 가지 않았다면 현재에 이르지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위에서 소중한 내 인생과 타협이라고는 폄하했지만 이 과정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다양한 경험이 현재 예능 PD라는 직업의 자양분이 되었다. 


S카드에서는 위계질서 가득한 대기업의 생리를 배웠고 상품개발 업무를 담당하며 사람들의 소비심리와 트렌드 파악법을 배웠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무엇에 돈을 쓰는지를 배웠다. 당시엔 허송세월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소비 심리란 뭘 하든지 간에 매우 유익한 정보이다. 


M본부 지역사에서는 방송의 A to Z를 배울 수 있었다. 지역사는 PD직무가 세분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교양, 시사, 다큐, 예능, 스포츠, 공연 등 모든 분야를 두루 배우고 또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소수의 PD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사 PD가 된다면 초반엔 프로페셔널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된다. 물론 연차가 쌓이면서 자기 분야를 찾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프로페셔널로 빛을 발하기도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좋은 작품으로 상을 휩쓰는 PD들 중엔 지역사 PD들도 많다. 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추억에 젖어 잠깐 다른 곳으로 샜다. 

일본 드라마 "호타루의 빛"의 한 장면

물론 한 번에 자기가 인생을 걸고 몸 담고 싶은 천직을 만나 기회비용 없이 승승장구하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은 편이다. 천직에 대한 고민은커녕 일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그저 비바람 막아주고 저질 몸뚱이 누일 공간에 핸드폰 요금과 맥주 한 캔 살 돈이면 족한데 그 돈 벌려고 꾸역꾸역 회사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계발이나 행복감 없이도 훌륭히 회사 업무를 해내는 사람도 많다. 행복감보다는 책임감으로 버티는 경우다. 이렇게 생계비를 벌기 위한 직장 생활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자존감이나 행복감은 덜할 것이다.


To. 퇴사를 하려는 이들에게

결국 퇴사란 행복해지기 위해 저지르는 인생의 모험이다. 그래서 나는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다만 최소한의 검증 장치로서 퇴사의 이유 10가지를 써보고 그것을 당당하게 지인들에게 보여주기 바란다. 누가 봐도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합리적이라면 아주 좋은 결정이 될 것이다. 평소에 다른 일에 대한 관심과 노력, 행실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10가지 말만 그럴듯하게 써놓는다면 진심으로 그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은 섣불리 퇴사하라고 조언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자기 검증, 타인에 의한 객관적 검증을 모두 거친다는 점에서 퇴사할 10가지 이유 작성은 아주 좋은 장치다.


다만 지양해야 할 것은 보복적 퇴사.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현재 직장에 불만을 갖게 된다. 단편적인 예로 직장 상사 혹은 동료가 나를 괴롭히거나 내 성과를 빼앗아가서 소위 빅엿을 먹이는 방법으로 퇴사를 결정하는 경우다. 이런 퇴사를 할 경우 보복하려는 감정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동종 업계로 이직할 때 몸값을 높이기 위한 협상력을 잃게 된다. 심지어 퇴사한 이후에 큰 혼란에 빠지리라 생각했더 회사가 멀쩡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아주 작은 규모의 회사가 아닌 이상에 누군가의 백업으로 회사는 멀쩡히 돌아가게 되어있다. 항상 똥.씹.표로 분위기 싸하게 했던 앓던 이가 빠져나갔다며 행복하게 회식할 상사와 동료도 있을 것이다. 


퇴사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가장 행복해져야 멀쩡한 퇴사다. 내가 퇴사해서 급여가 많은 회사로 옮겨서 부모님, 이성친구만 행복해진다면 좋은 퇴사가 아니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 그 직장에서 엉덩이 붙이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일 할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사를 할 이유 10가지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질 10가지 이유로 생각하고 쓰면 마음이 편하다. 퇴사를 맘먹고 있다면 작성해보자. 그리고 당당히 보여주자.



내가 퇴사할 10가지 이유 = 내가 행복해질 10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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