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성공
스타트업 업계에서 최고의 타이틀은 성공 경험이기에, 창업을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성공 경험을 쌓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성공 경험을 만들고, 그 증명을 통해 더 큰 기회를 잡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업을 접고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나는 성공은 잠시 미뤄두고, 우선 성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표님은 이러한 내 생각을 듣고, 타이틀로서의 성공경험보다 실력이 중요하다고, 여기서 실력을 키우라고 하셨다.
일을 잘하는 것, 실력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 코드 품질이 측정 가능한 개발자나, 포트폴리오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디자이너와 달리 기획 직군의 성적표는 성과뿐이기에, 실력에 대한 증명은 결국 성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성장을 하겠다고 들어온 회사에서 깨달은 것은 성장과 성공은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기에 성과를 내야 하고, 성과를 내면서 실력은 성장한다. 선성장-후성공을 하겠다는 생각을 일찍 버릴수록 주니어 타이틀을 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명목과 실질 - 겉과 속의 고민
사람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경계하지만, 책 표지를 보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듯이, 겉으로 보이는 명목적인 스펙들을 무시할 수 없다. 나에게는 명목과 실질 사이의 큰 갈등의 지점이 컴퓨터공학 학위였는데, 나는 결국 학위를 따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공학적 기초는 매우 중요하지만, 당시로서는 당장 실무에 뛰어드는 게 직접적으로 실력을 키우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한 친구는 좋은 명목이 주는 장점으로 나를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귀찮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컴퓨터 공학 학위를 땄다면, 언제부터 개발을 했고, 왜 개발을 했고, 어느 정도 개발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학위를 통해 비전공자 개발자를 보는 색안경을 컴퓨터공학도를 보는 색안경으로 덮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뭐 아직까지는 후회는 없는 것 같다.
앞으로의 고민은 명목과 실질에 쏟는 노력의 밸런스이다. 회고를 하면서 지난해는 보이는 것들에 소홀했던 것 같아서, 새해엔 나를 더 드러내는 방향의 한 해를 보내고 싶다. 또 그러다가도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나를 브랜딩 할 시간에 내실을 더 다져야 하나 싶어서 망설여지기도 한다.
선택과 집중 - 공간 축에서의 고민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보단 여러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하나에 올인해야 하지 않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듣는다. 여러 업무 간의 스위칭 코스트나, 에너지의 분산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일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많이 강조된다. 하지만 이미 기획자들은 기획, 마케팅, CS, QA, 리서치 등 하루에도 다양한 일을 하지 않나? 스타트업에서는 특히 개발자들도 한 명이 서버, 프론트, 인프라, 데이터 전처리, 크롤링 등을 다 하기도, 디자이너 혼자 콘텐츠, 인쇄물, UI/UX, 브랜딩을 다 하기도 한다. 한 회사에서 7가지 업무를 하는 것이 7개의 회사에서 1가지 업무를 하는 것보다 '집중'인 걸까? 아니면 한 가지 테마로 묶이는지 여부가 중요한 걸까?
스누프라이스와 피로그래밍 때처럼 한 가지에 완전히 몰두했던 때가 있었지만, 그 이후 선택과 집중은 내게 늘 어려운 숙제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그다지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는 문어발 회사의 신사업팀에서 맘껏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지금은 제페토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무언가 하나에 선택과 집중하게 될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
존버와 손절 - 시간 축에서의 고민
일이 잘될 때는 별 문제가 없다. 안될 때가 문제이다. 항상 버리는 것, 내려놓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모든 의사결정자들은 굉장히 다양한 상황에서 결국 크고 작은 go와 stop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숱한 창업 성공담이나, 열정에 기름붓기 같은 채널, 그릿 등의 책 등 존버가 미덕인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존버가 정답이 아닐 때도 많다. 과연 존버형 인간이라는 게 있을까?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에 대해 존버를 하기도 하고, 손절을 하기도 하는 것 같다. 존버만큼 손절도 능력이다. 여러 의사결정에 있어서 존버만 할 수도, 존버를 절대 안 할 수도 없기에, 존버냐 손절이냐보다 그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존버를 위한 존버가 아닌지 의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