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team fit의 중요성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 순으로 위아래가 나뉘었지만 21세기에 업계의 귀천은 없다. 다만 업계별로 꽤나 다른 특징이 있고, 창업자의 성향에 맞는 업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투자받고 J커브 그리는 확장 가능한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자영업을 하거나, 비즈니스의 본질은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년 간 매출이 0원일 수도 있는 소셜 플랫폼 모델을 하면 괴로울 것이다. 재미로 나눠본 스타트업계의 사농공상.
-선비형(사)
VC나 엑셀러레이터, 멘토, 브런치에 글을 쓰는 IT논객들도 선비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사업을 하는 창업가 중에 선비형을 찾는다면, 현재 스타트업 씬에서 가장 주류에 해당하는 IT 서비스 창업가들이 선비일 것 같다.
그들 중에서도 선비 of 선비들은 돈 버는 일에는 뒷전이고, 제품에 집착하면 고객은 따라온다고 말한다. 보통 이들에게 돈은 어떻게 벌 거 냐고 물어보면 ‘어허, 어찌 의(義)를 얘기하는 마당에 리(利)를 얘기하시오’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건너온 그로-쓰해킹이니 스프린트 같은 신문물에 감탄하는 모습이 흡사 조선시대의 실학자와도 같다. 다행히 선진적인 문화의 좋은 부분들을 잘 받아들여 남녀는 유별하지 않고, 장유유서는 없는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한다.
IT시대의 논어 격인 ‘제로 투 원’과, 맹자 격인 ‘린스타트업’ 등의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듯 읽고 또 읽다 보면 과거시험 격의 시리즈 A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창업에 정진하고 또 정진하다 보면 장원급제 격의 시리즈 B 투자도 받고, 결국 나스닥 상장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농사꾼형(농)
실제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높지 않기에, 유사한 업계는 제조업 스타트업으로 보인다. 호흡이 길고, 몇 개월에서 몇 년은 기다려야 하는 모델.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였으니, 충분히 노력한 이후에 농사는 하늘의 뜻이듯 제조업에는 운도 많이 따른다.
코로나 등의 변수로 중국에서 부품 수입이 막히기도 하고, 무역 협정 변경으로 수출이 거부되기도, 공장에 불이나기도 한다. 모든 요소를 컨트롤할 수 없고, 지속적인 반복 개선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출시만 되면 비교적 성패가 명확하기도 하고, 한방을 노려볼 수도 있는 사업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고 했다. 농사꾼들의 피땀 흘려 고생한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수준이지만, 정작 몇 천억, 수 조원의 밸류에이션을 평가받는 IT 스타트업을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수확은 한 해를 보고 하는 것이 기에, 최소 단위 제품 구현이나 기능 추가의 사이클은 길지만, 수확 이후의 사업성 검증의 사이클은 오히려 짧을 수도 있다. J의 바닥에서 도대체 언제 오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J를 기다리는 플랫폼 창업가와 달리, 제조업은 풍작과 흉작이 확실하게 결정 난다. 그래서 일단 실행하고 빠르게 고치는 그로스 해킹 마인드보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한 치의 오차 없이 짜인 완벽한 기획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업계이다.
-기술자형(공)
확실한 기술이 있는 팀. 특허.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출신이나 박사 출신 팀들 중 이런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극도의 남초 성비인 경우가 많다.) 이런 기술자형 창업은 대부분 회사에 가보면 형 동생 문화가 난무하며, 대학원 연구실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랩 실에서 나와서 창업했거나 교수님 랩 실 그 자체가 회사인 경우도 더러 보인다.
이들은 자신이 만든 기술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면, 엄청 쉽게 설명해주는 말투로 엄청 어려운 얘기를 하고 뿌듯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보통 네트워킹이나 공개 발표 자리를 꺼리고,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밖에서 보기에는 도통 뭘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기술 자체에 집착하여 마켓 핏을 찾는데 헤매다가 좋은 비즈니스 인재가 들어오면서 퀀텀 점프를 하는 경우도 더러 보인다.
-장사꾼형(상)
비즈니스란 무엇인가 하면 결국 장사가 아닐까. 물건을 떼다 파는 비즈니스인 커머스/유통의 영역은 보통 첫날부터 돈을 버는 모델로 시작한다. 진입장벽이 낮아서 많이 뛰어들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남들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투자나 어벤저스 팀 빌딩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지만, 직원과 알바 고용은 쉽다.
양반 신분에 대한 갈망으로 족보를 사들였던 상인들의 마음일까. 조선시대 말기처럼, 돈을 좀 벌었다 하는 회사들이 IT 인력을 대거 고용하고, IT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조인트 벤처를 차리기도 한다.
다들 Product-market에 대한 핏을 이야기하지만, 특히 초기일수록 product-team의 핏이야말로 스타트업의 중심이다. 창업의 시작점은 창업자 본인에서부터이기 때문에 역시 나 스스로를 잘 알고 임하는 것이 높은 탑의 탄탄한 1층을 잘 쌓는 기본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노비 신세지만, 이 회사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아이템을 찾아 떠나게 될 때 어떤 업을 하는 게 맞을지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