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 nudge 이넛지 Jun 09. 2022

너가 그대로라서 좋아, 그 이면

셈하지 않았던 노동의 가치

임금노동만 '진짜 노동'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 노동은 잊은 것이다.
- 라즈 파텔 & 제이슨 무어,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2020


어제 오랜 대학교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한참 이야기하다, "넌 정말 여전하구나. 난 가 그대로라서 좋아." 라고 말했다. 사실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가 워킹맘인데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좋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순간 엄마가 떠올랐다.



가사 노동의 실체

대학교 졸업 후 몇년 간 독립 생활을 하면서 혼자 살아도 집안의 먼지는 왜 이렇게 많은지, 퇴근하고 들어온 집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려면 내가 집에서 얼마나 가사에 충실히 임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던 나의 뇌는 퇴근 후 집에만 들어서면 자연스레 오프 모드가 되었고, 가사는 애초에 내 영역이 아님을 고등학교 가정 시간부터 알아차리지 않았냐는 내안의 속삭임에 굴복한지 오래였다.


집은 편안히 쉬는 공간으로 충분하다고 나와의 타협에 스스로 만족했으나, 가끔 출몰하는 엄마의 원성은 이러한 타협과는 별개로 늘 반복되었으며, 그 때마다 나는 귓등으로 내던지며 바쁘게 사회생활의 소임을 다했던 듯 싶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가사 노동의 실체가 드러났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먼지가 상대의 눈에는 보이고, 상대의 눈에 거슬리지 않던 것들이 내 눈에는 거슬린다. 이 무슨 마법인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레이더 감각, 나와는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은 결국 한 집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맞벌이 부부가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가사 노동의 분담이 선행되어야 함을 그 때 알았다.


그렇게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지나면, 소중한 생명체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새로운 생명체는 내 스스로 몰랐던 인격까지 꺼내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게 하는데, 가사 노동 역시 한층 더 높은 레벨로 다가왔다. 집안은 진공상태가 아니며, 그런 청결한 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 과거 아이들은 흙도 먹으며 자랐다는데, 우리집은 그래도 흙바닥은 아니지 않냐는게 나의 사고관이었다.

 


돌봄 노동의 실체

문제는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양육하면서 부터다. 이제 가사 노동에 돌봄 노동이 +1이 아닌 +3의 강도로 얹혀서 다가오는 순간, 전두엽의 인격과 태도, 문제해결 판단력에 큰 손상이 나타나는 듯한 충격을 마주하게 된다. 다행히도 엄마는 손주가 귀여워서가 아닌, 딸이 사회생활을 잘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원사격에 나서주었다.


가사뿐 아니라 육아에도 영 소질이 던 나는 결국 굉장히 저렴한 친정 엄마의 노동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녀는 출퇴근제로 우리집을 오가며 집안일과 아이들의 하원을 돌봐주는 집안의 대들보같은 역할을 한다. 내가 아프면 집에 아무 이상이 없지만, 그녀가 아프면 우리 가정에 굉장히 크나큰 폭풍우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아로나민 골드와 각종 비타민을 매일 챙겨 먹으며, 자신이 아프면 안된다는 견고한 마인드셋으로 무장한 채, 아이를 돌본다.


아이가 하나가 아닌 둘이 되는 순간, 또다시 엄마의 원성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정말 단단히 화를 냈다. 느즈막히 친구들과 즐기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의 날개를 꺾은 셈이었다.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아이들의 방학일정에 맞추어 그녀 또한 자유시간을 얻게 되니, 임금 노동자와 비교해 그녀 또한 무엇 하나 다른게 없다. 게다가 52시간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가사와 돌봄 노동을 하는 엄마는 사실상 억대 연봉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상은 소정의 용돈으로는 커버되지 않는 영역을, 사랑과 희생이라는 고결한 소명하에 이 모든 무게를 짊어진 '친정 엄마'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 그대로일 수 있는 이유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핵가족화라는 단어가 이제는 낯설고, 오히려 1인 가구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진 시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핵가족으로는 아이 양육이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맞벌이 부부 가정에서는 아이를 중심으로 조부모가 행성처럼 적정 반경을 유지하거나, 때로는 위성처럼 나타나 지원한다. 심지어 공감대화법, 발달 놀이법 등 7세 이하의 손주를 양육하는 '조부모 교실'이 운영되는 것을 보면, 아이의 양육이 부부의 몫에서 조부모에게까지 확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부모 역시 맞벌이를 하였으며 그 당시 함께 살던 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양육하며 가사 및 돌봄 노동에 손을 보탰다. 맞벌이 부부에게 필요한 돌봄 노동이 사실상 임금노동보다 더 값진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채 부모의 내리사랑으로 커버된 것을 몸소 경험한 나는 여전히 그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셈하지 않은 이 노동시장은 어쩌면 영원히 기술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AI가 발달하여도 AI스피커가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며, 집안 로봇이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는 없을테니까.



친구가 말한 내가 "그대로" 일 수 있음은 사실 마의 지원 덕분이다. 내가 가사와 돌봄에 비싼 비용을 치루지않고도, 내 열정대로 공부하고 운동하고 책도 읽고 글을 쓰는 값진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니 말이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엄마의 손을 빌리는 것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되돌아본다. 마치 나 또한 자본주의식 사고에 물든게 아닐까 하면서.

 


자본주의에서 셈하지 않는 가치, 그러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것들, 이러한 것들을 가볍게 지나치지 말아야 나의 삶 또한 가벼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지금 사회에 필요한 사고방식이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잘러도 투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