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가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장난감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한 행운에 있지 않다. 자신이 퇴사한 뒤에도 회사가 지속적으로 번성하기를 바라는 직원들 덕분이다. - 사이먼 시넥, <인피니트 게임>
퇴사를 하게 되면
우리 회사는 퇴사를 하게 되면 직원퇴직서를 제출해야 한다. 첨부서류 중 하나로 부서장이 작성하는 면담확인서가 있는데, 그 의견서에서는 직원에 대한 평가가 담긴다. 직원의 업무처리능력과 업무중요도에 대하여 S, A, B, C 등급 중 어디에 속하는지 표시해야한다.
10년이 훌쩍 지나도록 이 회사를 다니면서 올해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친한 동생이 퇴사를 하면서 내게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회사를 나가는 직원이 얼마나 일을 잘 했고, 대체가능한 인력인지, 굳이 퇴사하는 직원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만약 '너가 일을 그럭저럭 했고, 넌 충분히 대체 가능한 인력이야.' 임을 표시해서 건네준다면, 그 사람은 퇴사하기 너무 잘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건 미련을 주지 않기 위한 잔인한 이별 방식 중 하나인걸까?
잔인한 이별통지서
그제서야 부랴부랴 같은 부서에서 퇴사한 직원의 서류를 찾아보았다. 작년에 퇴사한 우리 부서 누군가의 퇴직서와 첨부된 면담확인서를 본 순간 너무 놀랐다. 업무처리능력은 A등급, 업무중요도는 '퇴사시 업무대체가 가능한' B등급이었다. 그는 좋은 마음으로 회사를 나갔을까?
친한 동생은 퇴직서를 쓰는 당시,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인력임을 표시한 S등급을 받고서도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라 한들, 그동안 처우를 개선해주지 않은 이유는 대체 어떤 차별이냐며.
결국 퇴사신청서에 담긴 평가표는 그 어느 누구의 기분도 헤아리지 않은 잔인한 이별통지서와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치 우리 이만 헤어져, 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나도 너 별로였어.' 또는 '넌 내게 최고였지만, 난 다른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동안 고마웠어. 너도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래.' 라고 우리가 헤어질 때 예의를 차리며 하는 형식적 멘트가 회사의 이별방식에는 없다니...
쿨한줄 알았는데...
일을 하면서 의미를 찾고 그 속에서 '나'를 찾으려다보면, 마치 내가 대체 불가능한 직원이 된 것만 같은 환상에 빠질 때가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너 아니면 안된다'는 달콤한 멘트를 계속 들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토끼굴에 빠져버린다. 어쩌면 선배들은 토끼굴에서 오랜 시간을 해매면서 직장에 몸과 마음을 다해 일했는지 모른다.
나 역시 토끼굴에 빠져있다가, 잠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워라밸을 고수하며 너와 나의 간격을 유지하고, 어차피 나 아니어도 되잖아? 하면서 쿨하게 회사를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이 회사의 이별방식에 분노하면서 감정이입한 것만 보아도, 내가 쿨하기보다는 굉장히 질척거리는 직원인 것만 같았다.
연인과 사귀면서도 질척거렸던 적이 없는데, 헤어질 때면 늘 쿨하게 헤어졌던 것 같은데. 친구들이 너는 어쩜 그래, 하면서 놀라워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연인 사이에서는 내가 질척거릴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랬던게 아닐까 싶다. 상대방이 사람이든 회사든, 인격 여부를 떠나서 결국 내가 얼마나 마음을 다 하느냐에 따라 상대와의 간격은 좁아지기도 벌어지기도 하니까.
질척거리는게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이직도 잘 하고, 새로운 직장에 또 잘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직을 해보지 않은 나는 그 마음을 아직은 완전히 모른다.
물론 내게도 첫 직장이 이곳은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했던 첫 직장에서 클라라 지점장님은 나에게 빨간색 몽블랑 명함지갑을 선물해주셨다. 일하면서도 내가 어떤 면에서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는지 알려주셨다. 그리고 이후 제니 지점장님까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함께 교육을 들었던 동기들까지도. 그러나 나는 워킹비자 발급에 문제가 생겨서 퇴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회사는 인수합병되어 없어졌다. 그러나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차피 회사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일했는지 나는 나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온전한 기억은 내가 나에 대한 기억이니까. 질척거리는 직원이 된 것만 같은 기분 또한 바꿔말하면 너무 열심히 일한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둬야겠다.
이별키트는 없을까
요즘 회사에서는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회사에 입사한 것을 축하하는 웰컴키트를 선물한다. 그 키트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별키트는 없을까. "그동안 고마웠고 수고했어. 너의 앞날을 응원해." 이런 마음이 담긴 이별키트 말이다. 첫 만남도 중요하지만 헤어짐의 순간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아, 질척거리고 싶지 않다더니, 너무 질척되는건가.)
난 오늘도 회사에 일하러, 애증의 감정을 쌓으러 간다. 만약 퇴사하는 날이 오면, '난 최선을 다했어. 너도 잘 살아.'라고 말해줘야지,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