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딩 Jan 15. 2024

이모와 티타늄 안경테

이모를 모시고 안경을 맞추러 갔다.(사실 이모에게 존대를 쓰는 것이 익숙지 않아 이모를 ‘모시고’라는 표현보다는 이모를 ‘데리고’라는 표현이 심적으론 좀 더 가깝다. ) 눈이 나쁘신지는 오래되었다. 몇 번 안경을 바꾸기도 하셨는데 내가 함께 안경점에 간 것은 처음이다.


이모는 내게 엄마 같은, 어쩌면 엄마 이상의 사람이다. 맞벌이를 했던 엄마 대신 나를 키워주었고 지금은 같은 아파트에 살며 나의 아이들을 키워주고 있다. 육아 부분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내게 심적으로 대들보 같은 사람이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이모가 없는 삶이 상상이 잘 안 될 만큼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토록 나에게 중요한 사람인 이모는 그간 눈이 안 보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안경이 있으셨지만 편두통 때문에 안경을 쓰질 못했다. 귀 뒤를 안경테가 압박하면 머리가 아파서 안경을 쓰고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안경을 두고도 쓰지 못하고, 늘 초점이 잡히지 않아 눈가에 주름이 잔뜩 잡히도록 늘 눈을 반쯤 감고 뜨셨다. 저녁이 되면 눈이 침침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왜 그동안 지나가는 말로 들렸을까. 왜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삭신아..”처럼 나이 드신 분이 으레 하는 말인 듯 흘러들었지 진지하게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러다 길에서 넘어질까 걱정이다."라는 말씀을 했다. 눈이 침침해서 저녁이 되면 눈이 안 떠진다고도 했다.


난 그제 서야 이모가 정말로 힘들다는 걸 알았다. 단순히 ‘힘들다’는 하소연이 아니라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도.


이모가 앞을 잘 못 보는 원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안경을 끼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불편한 안경테를 쓰면 머리가 아프다는 게 문제였다. 테를 몇 번 바꾸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예전에 한번, 이모가 지나가는 말로 동생이 쓰는 안경테를 한번 써보니 참 편한 것 같더라고 말했다. ‘그런 안경테는 비싸다던데...’하며 말 끝을 흐렸던 것도 기억이 났다. 동생에게 전화해서 그게 뭔지 물으니 70만 원 대의 린디ㅇㅇ 티타늄 안경테라고 했다.


가까이 살며 하루에도 몇 번을 만나고 아쉬울 때마다 이모를 찾으면서 이모가 그토록 앞이 안 보인다고 힘들어하셔도 으레 안경을 못 쓰시니 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그동안 좋은 안경테 한번 찾아볼 생각을 못했다.


아이 일이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아이가 눈이 어두워 글자가 잘 안 보인다고 한 번만 말했어도 그날로 바로 안과나 안경점에 데려갔을 거다. 아무리 사랑이 내리사랑이라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무한한 희생을 베푸는 이모에게 받는 것은 당연히 여기고 챙기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인터넷 검색도 하고 자주 가는 카페에 문의글도 올리고 동생과 의논도 해보았다. 요즘은 티타늄테의 진입장벽이 낮아졌고 마진을 낮추어 저렴하게 파는 안경점도 생겼다고 했다. 비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좋은 건 비싸다는? 인생의 진리 같은 말도 들었다.


내 동생은 해외브랜드 안경을 쓰는데 그게 그렇게 편하단다. 이왕 안경을 바꿔드리기로 맘먹은 김에 해외브랜드 안경을 해드릴까 하다가 한편으론 70이나 하는 가격이 부담스럽긴 했다. 그러던 차에 마진을 줄이고 정찰제로 가성비 좋은 티타늄테를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들은 정보와 지인의 추천이 일치하기에 그곳으로 이모를 데려갔다. ㅇ뜸안경이란 곳이었다.


50~100만 원까지 한다던 티타늄테가 그곳에선 5~20만 원대였다. 검색해 보니 티타늄의 함량이나 브랜드 네임벨류에 따라 가격대가 달라진다고 했다. 가격이 저렴해서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의심이 되었다. 더 좋은 것을 해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저렴이 버전을 쓰다가 또 머리가 아프면 어쩌지?

아냐.. 안경테는 거품이 엄청 껴있다는데 써보고 편하기만 하면 유명 브랜드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느라 내가 한발 물러서 있자 이모는 자꾸 저렴한 안경테를 썼다 벗었다 했다. 나는 안경사분께 비싸도 되니 제일 가볍고 편한 안경테를 보여 달라고 했다. 안경사는 20만 원대의 안경테를 꺼내어 오셨다. 나는 그것마저 이모에게 미안했다. 가장 좋은 안경테가 20만원이라니... 고급 안경점에선 저렴한 편에 속하는 안경테가 이곳에선 가장 비싼 안경테일지도 모르는데... 마치 선심 써서 큰 선물이라도 하듯 ‘가장 좋은 안경테를 내오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내가 쓸 것이었다면 '올커니! 혜자스럽네!'했겠지만, 이모에게 사드리는 첫 안경이라 생각하니 미안했다.


이모는 안경사가 추천한 안경테를 써보더니 역시 비싼 게 좋구나 하며 이것이 제일 편하다고 하셨다. 난 어쩐지 더 좋고 더 편안한 안경테가 있을 것 같아 이모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동생이 말한 린디ㅇㅇ를 취급하는 안경점에 데려갈 것을... 편두통 때문에 안경테를 몇 번이나 바꾸고도 안경 적응에 실패한 이모인데...


혹시 이곳이 가격에 거품을 뺀 좋은 안경점이 아니라, 딱 가격만큼만 하는 제품을 갖다 놓고 저렴하게 판매하는 안경점은 아닐까-하고 걱정되었다.


이모는 안경테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나 렌즈를 끼웠을 때와 안 끼웠을 때의 무게감과 착용감이 다를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다른 곳에 가보자고 했다. 이모는 이것도 충분히 편하다고 하셨다.


시력에 맞는 렌즈를 제작하는 동안 이모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혼자 오신 할머니 한분이 우리 모녀(이모와 난 사실 모녀지간과 똑같다)를 흐뭇한? 혹은 조금은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띠고 계셨다. 이모가 혼자 안경을 사러 가서 자녀와 함께 온 다른 일행을 보며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모를 혼자 보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분쯤 후 안경이 나왔다. 안경사가 안경을 씌워드리자 이모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아이고 세상이 이렇게 밝았나. 심봉사가 눈 뜬것 같다."라고 했다.


나는 왠지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20만 원 남짓밖에 안 하는 것을.. 이모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왜 그동안 이렇게 무심했을까.


계산을 하려고 내가 카드를 내밀자 이모는 자기가 사려고 돈을 뽑아왔다며 부랴부랴 지갑에서 5만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 내가 내겠다고 크게 비싸지도 않다고 하니 한사코 내 손에서 카드를 뺏었다.


“휴직했어도 이 정도 낼 돈은 있다. 내가 사주께.” 하고 말하니

“치아라 마. 그러면 니랑 앞으로 같이 안 온다.”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면서 내가 민망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던 할머니와 안경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사실 이 돈도 다 우리 딸이 준거예요"라고 괜히 한마디 덧붙였다.


이모에게 추석, 설날, 어버이날, 생신 제외하고는 그다지 돈 드린 적도 없거니와 돈을 드려도 다 우리 아이들 반찬이며 옷가지 사느라 쓰는 사람인데...


마음이 아팠다. 이모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결제는 결국 이모가 했다. 그래도 이모는 딸 덕분에 세상이 밝아졌다며 한사코 나에게 고마워했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아이고 이제 저 작은 간판도 보이네. 눈앞이 선명하니 사람이 살겠네."라고 말했다. 이모가 좋아하는 모습을 볼수록 나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점점 쪼그라 붙는 것 같았다.


"편한 것 같나? 귀 뒤쪽 안 불편하나?"

"괜찮네. 좋은 테 쓰니 안 불편하네. 요즘은 기술도 좋다야. 잘 보이니 너무 좋네."

"하루 종일 쓰고 있어 봐야 진짜 편한지 안 편한지 알지. 혹시라도 불편하면 말해라.. 더 좋은 테로 바꿔줄게."

"안경점에서 제일 좋은 걸로 했는데 뭔 소리고. 이거 오래오래 써야지."


딸내미가 직장생활을 10년 넘게 했는데.. 안 쓴 것처럼 가볍다는 해외 브랜드 안경을 일시불로 긁어주고 싶은데... 앞으로 몇 년간 이모의 눈이 되어줄 안경을 100만 원도 안 되는 돈 때문에 저울질한 것이 미안했다. 이모가 마음의 불편함 없이 선뜻 딸의 선물을 받을 수 없는 나의 형편이 미안했다.


20만 원짜리 안경 정도는 사드릴 여력이 되는데...


휴직한 지 꽤 되어 나의 잔고가 진작 동 났을 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고, 또 그렇다고 사위 돈을 쓰기엔 괜히 미안하고 그런 마음이셨지 싶다. 그러면서 혹시나 내가 미안해할까 봐 연신 딸 덕분에 좋은 안경을 샀다며 날 추켜 세워 주었다.


새 안경을 맞춘 다음 날, 전화를 걸어 "안경 계속 쓰고 있어 보니 어떻노?"라고 물었다.

이모는 "그럭저럭 좋네. 전에 쓰던 거보다 훨씬 낫다. 적응하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이, 그 안경이 내 몸처럼 편한 것은 아니라는 말임을 즉시 알았다.


"이물감이 조금 있나 보네. 머리 아프다 싶으면 언제든 말해라. 더 좋은 거 하러 가자."

"이 정도는 암 것도 아니다. 옛날 안경은 한 시간도 못쓰고 있었는데 이건 몇 시간째 써도 괜찮다. 이 정도면 충분하데이."


이모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했지만.. 난 왠지 이모에게 더 편한 안경이 있을 것만 같아 신경이 쓰였다.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써야 하는 안경인데.. 편두통이 있는 사람인데...


난 괜히

"이 안경은 1년만 딱 쓰고 돌아오는 생일에 ㅇㅇ(동생)이랑 합쳐서 린디ㅇㅇ 안경 사줄게. 그건 진짜 안 쓴 것처럼 가볍다더라."라고 말해보았다. 내 마음 편하자고.


이모는

"안 쓴 거 같은 안경이 세상에 어디 있니. 이 정도도 너무 감사하다야. 몇 시간을 끼고 있어도 안 아프다니까. 티타늄인가 뭔가가 좋긴 좋네. 정말 심봉사가 눈 뜬 거 같다니까"라고 말했다.


고맙고 미안한 우리 이모.

등본을 떼면 남편도 자식도 없이 본인 이름만 덩그러니 있는 이모이지만, 이모는 내게 촌수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내 가장 가까운 가족이다.


임영웅을 좋아하는 이모를 위해, 아마 안 되겠지만 다음 주 임영웅 콘서트 티켓팅에 최선을 다해봐야겠다. '똘이가 좀 괜찮아지면...'하고 미루고 미루었는데 이젠 더 미루지 말고 이모 허리랑 무릎이 더 안 좋아지시기 전에 해외라도 한번 모시고 나가야겠다.




#티타늄안경테, #으뜸안경, #모녀관계, #에세이

작가의 이전글 메디키넷 부작용으로 리스페리돈을 추가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