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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Aug 23. 2024

불멸하는 것<닥터 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혁명은 구체제의 전복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파괴의 대상이 부패한 구체제와 악습뿐 아니라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는 모든 인간과 과거에 쌓아 올린 모든 문화유산’으로 확장되기 쉽다는 점이다. ‘혁명’이라는 이름에는 항상 피 냄새가 섞여있다. 영국의 명예혁명과 체코의 벨벳혁명의 이름 앞에 각각 ‘glorious’와 ‘nežná(신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무혈혁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증한다.


혁명을 통해 일구고자 하는 새로운 체제가 아무리 이상적 가치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방식으로밖에 완수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20세기 러시아에서 시인이자 소설가로 살았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소설 <닥터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통해 던진 질문이다. <닥터지바고>의 배경은 공산혁명 전후 격변기의 러시아다. 피의 일요일, 1차 대전, 볼셰비키 혁명, 적백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역사.... 혁명의 파고를 온몸으로 마주한 인물들의 삶, 사랑, 신념, 그리고 혁명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오마샤리프 주연의 영화 <닥터지바고>의 영향인지, 많은 이들이 <닥터지바고>를 ‘하얀 설원 위에 펼쳐진 운명적 사랑이야기’로 기억한다. 하나 사랑이라는 코드로만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소설의 의미를 너무 축소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닥터지바고>의 진짜 주인공은 ‘러시아 혁명’, 혹은 20세기 러시아 그 자체다.


‘혁명’이라는 코드로 <닥터지바고>를 읽는다면 이 작품의 중심축은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 아니라 지바고와 스트렐리니코프(라라의 남편 ‘파샤’)의 대비다.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두 유형의 인물을 통해 혁명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바고는 예술가이자 나약한 지식인이고 스트렐리니코프는 주의(主義)로 무장한 혁명가다. 귀족출신 예술가인 지바고에게 ‘삶’이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자체다. 인간에게서 정신적 자유를 빼앗고 예술을 억압하며 맹종을 강요하는 ‘혁명’은 지바고형 인간에겐 ‘미화된 폭력’ 일뿐이었다. 이에 반해 노동계급으로 태어나 인텔리겐차로 성장한 스트렐리니코프에게 삶은 생존 투쟁의 장이자 불평등의 굴레이다. 스트렐리니코프형 인간에게 있어 지바고가 말하는 자유와 예술이란 다수의 희생을 통해 소수가 누린 부당한 향락일 뿐이었다.



지바고와 스트렐리니코프의 가장 큰 대척점은 ‘국가와 인간을 조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에 있다. 지바고에게 있어 인간은 무수한 가능성과 개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다. 국가나 체제는 개개의 삶이 모여 이루어진 유기체이지 이념이 요구하는 모양으로 조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 또한 개조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발현되어야 할 존재다. 스트렐리니코프는 국가와 인간을 훨씬 단순하게 해석한다. 그에겐 국가도 인간도 하나의 질료다. 그는 완벽한 원칙과 이념이 완벽한 체제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파괴도 살상도 정당성을 얻는다. 스트렐리니코프는 국가는 기계가 아니고 이데올로기는 작동매뉴얼이 아니며 인간은 단결될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우리 러시아 땅은 허위가 휩쓸기 시작했어요. 불행의 근본은, 다시 말해서 그 후의 모든 악의 근원은, 개인적인 의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데 있어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시대는 이미 과거의 유물로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남들이 노래하는 데 맞춰 함께 노래를 불러야 하고, 외부에서 강요하는 관념에 보조를 맞춰 살아나가야 한다고 모두들 생각한 거예요/ 판에 박은 화려한 구호가 판을 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제정주의의 구호가, 다음엔 혁명의 구호가 말이예요.”p416



공산혁명 당시의 러시아에서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기준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였다. ‘개인의 자유와 휴머니즘’을 운운하며 시덥잖은 연시를 써대는 지바고의 존재는 박쥐나 반동분자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념을 맹종하기엔 그는 너무도 예민하고 비판적인 인간이었으며, 살기 위해 거짓으로 혁명에 동조하기엔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정직했다. 눈감고 귀 막은 채 펜을 꺾기엔 뼛속까지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고, 그렇다고 조국을 등지거나 죽음을 택하기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이었다. 역사의 파고에 휩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좌절했던 예술가 지바고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지바고)는 뛰어나가서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말을 소년에게 던지고 싶은 충격을 간신히 억눌렀다. 인간의 구원은 형식을 충실히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형식을 내동댕이치는 데 있다고! p259



지바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영혼을 지켜내는 것’이었던 반면, 스트렐리니코프에겐 혁명이 완수되기 전엔 개인의 삶도 없는 것이었다. 이토록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순수성의 측면에서 교집합을 이룬다. 지바고의 순수는 복잡하고 정직한 순수함이고, 스트렐리니코프의 순수는 단순하고 원리원칙적인 순수함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바고는 고난을 타계할 결단력과 추진력이 결여된 인물이란 점에서 현실대처능력이 부족하고, 스트렐리니코프는 완벽한 이념이 완벽한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현실판단능력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이들의 삶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지바고를 통해 한탄할 뿐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의 나약함을 묘사하면서도 창조적 상상력을 억압하는 시대를 살아야 했던 예술가에 대한 연민을 내보인다. 또한 스트렐리니코프를 통해 인간이 개인이기를 포기하고 이념을 맹종할 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렇습니다. 사실 나는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중략) 시대는 나를 고려에 넣지도 않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다만 그것에 순응해야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까? 나의 생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오늘날 러시아 어디에 현실이 있습니까? 내가 보기엔 현실은 지금 너무나도 위협을 받아서 숨어버린 것입니다.(지바고)” p236
“그(스트렐리니코프)는 불행한 결말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거지요. 제멋대로 날뛰는 혁명가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들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궤도를 벗어난 기차와 같은 조절할 수 없는 메커니즘 탓이에요.”p308
“인간은 살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지,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단 말이에요.” p309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고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던 두 인물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가족과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도,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걸지도 못했던 지바고는 세상과 단절한 채 시작(時作)에 몰두한다. 스트렐리니코프는 혁명이 완수된 조국에서 영웅이 되기는커녕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가슴 아픈 운명이지만 매우 그들 다운 행보다. 지바고는 사랑도 가족도 잃었지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그에게는 모든 걸 잃어도 끝끝내 잃어지지 않는 것, 시(詩)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바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애도하는 방법은 시를 통해 라라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의 예술은 시대에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에게 내재한 예술가적 기질은 그에게 삶의 끈이 되어준다. 반면, 신념에 모든 것을 걸었던, 세상을 ‘아군/적군’으로 양분하여 대했던 스트렐리니코프에게, 조국에 버림받은 이후의 삶에서 남은 선택지는 자살뿐이었나 보다. 예술로 세상에 흔적을 남긴 지바고와 자살을 택함으로써 역사의 먼지로 사라진 스트렐리니코프, 결국 인간을 진정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사랑과 예술이라고 믿어도 될까?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 역시 ‘이념’이 아닌 ‘문학’이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공허한 설원에 기적소리가 울린다. 끝없이 펼쳐진 흰 대륙 위로 기차 한 대가 기다란 횡선을 긋는다. 그 기차를 타고 파스테르나크가, 지바고가, 스트렐리니코프가 세기를 뛰어넘어 나에게 온다. 그리고 말한다. 이념의 맹종은 언제나 위험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기억되는 것은 오직 사랑과 예술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건설된 국가나 체제는 본질적 가치가 아무리 숭고하다 해도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


감히 말하건 데 <닥터지바고>는 불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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