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눈이란...
너의 태명은 “설”이었다. 눈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나와 네 엄마가 함께 지었던 이름이다. 사실, 너의 엄마는 눈을 무척 좋아한다. 눈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설이라고 불렀던 것을 내가 그냥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다고 갖다 붙인 것인지도 모른다. 눈에 대해서는 너의 엄마와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들을 너에게 남겨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에 오기 전까지 천혜의 자연환경의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따뜻한 섬에서 20년을 보냈다. 어렸을 때는 제주도가 이렇게 따뜻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비교할 만한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처음 갔을 때, 아빠는 정말이지 귀가 끊어질 것 같은 추위를 경험했다. 기온 자체가 영하라서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나의 피부들은 무척이나 당황했던 것 같다. 정신을 잃고 마비된 피부들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사실 어린 마음에 귀를 함부로 만지지도 못했던 기억이 있다. 만졌다가 얼음처럼 부서지기라도 하면 나는 귀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리고 그 해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는데, 제주도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을 또 한 번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눈이 오는데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게 아닌가! 제주도에서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눈이 오기는 하지만, 우산을 쓰고 눈을 막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눈이 와도 따뜻해서 금방 녹아 없어지기도 하고, 바람이 많이 불어 우산을 써도 눈을 피하지 못해 사람들이 그냥 다녔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은 눈이 오면 하나둘씩 우산을 꺼내 펴기 시작하였다. 신기했다. 나에게 눈은 하늘에서 선별된 깨끗함들이 뭉쳐져 하얀 결정으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었고, 그 눈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더러운 세상에서 녹아 흙탕이 되거나 검게 변하면서 인간들이 얼마나 지저분한 세상을 만들었는지 반성하라는 하늘의 메시지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깨끗한 눈을 우산으로 막아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튼, 눈은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고, 특히나 제주도에서의 기억은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거나 쌀 포대를 가지고 경사면을 이용해서 눈썰매를 타는 게 다였다. 제주도에는 스키장이 없었고,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스키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네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네 엄마가 나의 여자친구였던 시절, 그녀의 제안으로 스키장을 가게 되었다. 역시, 서울 친구들은 스키장이라는 곳이 익숙하구나 생각하며 한 번도 가보지 않아서 어떻게 스키를 타야 하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었다. 네 엄마는 호기롭게 자기만 믿으라며 나를 용평에 있는 스키장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 스키라는 것을 타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방향을 바꾸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그냥 직활강을 했었고, 그때마다 폴대를 밀어내며 신나게 속도를 내고는 어느샌가 내 앞으로 와서 나를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으며 멈춰주는 네 엄마가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웠다. 정말이지 너무 멋있었다. 그렇게 두세 번 네 엄마와 스키장을 갔었고 이제 초급에서는 문제없이 탈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스키장이 이렇게 신나고 재미있는 곳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네 엄마가 왜 눈을 이리도 좋아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날따라 스키장에서 환하게 웃는 너의 엄마가 훨씬 더 예뻐 보였고,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네 엄마를 위한 프러포즈는 반드시 눈 속이어야 한다고...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시절 의무적으로 한 학기를 해외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했었다. 해가 바뀌면 미국으로 6개월을 나가 있어야 했기에, 한창 사랑이 활활 타오르는 네 엄마와의 연애 시절의 행복을 뒤로하기가 너무나도 슬펐었다. 그때 마침, 함께 미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미국 덴버에 있는 애스펀이라는 곳으로 스키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했었다. 세계 3대 스키장 중 하나였던 그곳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스키 코스와 이국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나는 그곳으로 네 엄마를 초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덴버 공항에서 만날 수 있도록 동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는 그곳에서 네 엄마와 단둘이 스키를 타는 동안 눈 속에 반지를 묻어두고는 프러포즈를 했었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프러포즈를 말이다. 그렇게 아빠와 엄마는 한 가족이 되기로 약속했고, “설”이를 만날 준비를 했었다.
지금 살고 있는 김포에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많은 눈이 온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렇다. 눈이 오면 신나하는 네 엄마를, 그리고 덩달아 뛰어다니는 너를 보면서 오늘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밖으로 나간다. 덕분에 나도 점점 눈이 좋아지고 있다. 애스펀에서의 좋은 기억들이 생각나고 언젠가 너를 데리고 그곳에서 스키를 타는 꿈을 꾸고는 한다. 네가 어렸을 때 스키를 가르칠 것이고 언젠가 우리 가족 모두 함께 애스펀에서 스키를 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너의 아빠와 엄마가 행복했던 그때 그 시간을 다시 한번 말이다. 내 삶의 소중함과 내 사랑의 소중함, 나와 네 엄마의 행복을 너에게 모두 전해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순간 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펼쳐질 테니까... 아빠는 벌써부터 설렌다. 오늘은 김포에서 눈싸움을 하고 있지만, 훗날 반드시 너와 함께 애스펀의 눈을 밟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