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AI와 기술이 보편화된 세상의 일상 (2)

by Adam Choi

책을 덮자, 눈앞의 화면이 잔잔히 빛났다. AR 글래스가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인식하고, 작은 창을 띄웠다.


“오늘의 메모를 정리하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지금까지 내가 흘려 적은 단어들이 모여 작은 지도가 그려졌다. 흩어진 생각의 조각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점점 연결되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추천 도서 몇 권과 알고리즘에 의해 연관성이 높은 영상 몇가지가 미리보기 형태로 제공되었다.


나는 모든 창을 닫고 가방에서 테블릿을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여러 소설 플롯과 등장인물, 대륙과 나라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엄청나게 많은 프롤로그 초안, 그리고 몇개의 에필로그도 함께 목차로 구분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한때 작가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늘 모호한 희망에 가까웠다. 내가 가진 이야기가 진짜 가치가 있는지, 혹은 단지 나만의 공상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존에 녹음되고 적었던 메모들 중에서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키워드를 제거하고, 빈 공간에는 관련된 키워드들을 덧붙였다. 세계에는 지도가 표기되어 있었고 핵심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었으며 시대순으로 각 장소에서 발생할 핵심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으며 가장 아래 버튼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어떤 사건을 추가하시겠습니까?”


질문은 단순했지만, 답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팬을 이용해 지도에 몇가지를 표시했다. 적듯이 몇 개의 짧은 단어를 써 넣었다. '유령선', ‘떠도는 도시’, ‘사라진 언어’. 그러자 지도는 다시 형태를 바꿨다. 섬들이 연결되고, 빈 공간에 바람결처럼 흐릿한 문장들이 스쳐 갔다.


마치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듯 등장인물과 배경을 하나 하나씩 만들어 나갔고, 세계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세계관의 프레임을 만드는 일이었지만, 그 위에 색을 입히는 건 여전히 AI의 몫이었다.


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언제나처럼 평범했지만,

내 머릿속의 작은 세계는 그 나무처럼 점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손끝을 가볍게 움직이자, 지도는 천천히 확대되었다. 흐릿했던 선들이 또렷해지고, 점처럼 찍혀 있던 구역 하나가 세부적으로 펼쳐졌다.


좁은 길 위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돌로 쌓은 낮은 집들 사이로 시장이 열려 있었고, 붉은 천막 아래에는 과일과 향신료가 가득 쌓여 있었다. 화면 속 사람들은 정해진 경로 없이 자유롭게 오가며, 서로 다른 언어로 짧은 대화를 나눴다. 낯선 억양이 뒤섞였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조금 더 확대하자, 거리에는 내가 추가하지 않은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낡은 간판, 아이들의 웃음소리, 지나가는 행인들의 서로 다른 피부색과 의복. AI는 내가 던진 몇 개의 단어를 바탕으로 시대적 배경과 인종, 종족, 언어를 제각기 채워 넣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완전히 낯선 세계였지만, 동시에 내가 상상했던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마치 내 머릿속 공상이 화면 위에서 자라나, 스스로 호흡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한순간 장면이 멈추고, 세부 요소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작은 창이 떴다.


먼저 하늘을 가리켰다. AI는 푸른 하늘 위에 흰 구름을 띄워 두었지만,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늘에 얕은 구름막을 추가하자 즉시 화면 위의 하늘이 바뀌었다. 푸르름이 사라지고, 미묘한 잿빛이 번졌다. 빛은 여전히 있었지만,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가 남았다.


이어 상점가를 살폈다. 천막 아래 늘어진 노점상들은 활기차 보였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풍경은 아니었다. 손끝을 옮기자 노점들은 사라지고, 대신 매끈한 유리 쇼윈도들이 나타났다. 정돈된 장식과 반짝이는 불빛이 거리 양쪽을 채웠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 안의 물건들을 들여다보았다.


유리 위에는 빨간색 배경의 느낌표시가 떠 있었다. 아마도 현 시대에 맞지 않는 기술이 상점에 적용된 탓이었다. 나는 오류를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질적인 UI가 내 시선을 빼앗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유리를 삭제하고 창살로 된 나무 가림막으로 재질은 변경했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먼지와 흙으로 이루어진 길은 조금 지나치게 투박했다. 나는 손끝으로 바닥을 긁어내듯 표시했다. 그러자 흙바닥은 점점 사라지고, 붉은 벽돌이 규칙적으로 깔렸다. 오류 표시가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 투박한 형태의 벽돌은 구현이 가능한 시대인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수정된 거리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AI가 구현한 세계였지만, 그 위에 덧칠된 선택들은 내 몫이었다. 완전히 낯선 세상 속에서, 이 디테일들이야말로 내가 이 세계의 생성에 개입했음을 증명해주는 흔적 같았다.




화면 위쪽에는 얇은 선이 수평으로 뻗어 있었다. 그 선 위에는 작은 눈금들이 박혀 있었고, 마치 오래된 오디오 장비의 이퀄라이저처럼 손가락으로 밀면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는 화면 위쪽의 시간축에 손가락을 올렸다. 살짝 밀자, 눈금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풍경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마치 빨리감기를 하듯 순식간에 변했다. 사람들의 걸음은 흐릿한 잔상이 되었고, 건물은 세워졌다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나무는 싹이 트고, 자라나고, 잎을 떨구며 사라졌다. 언어는 잡음처럼 뒤엉키다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억양으로 바뀌었다.


나는 손가락을 멈추고, 눈금을 일정 위치에서 눌러 고정했다. 흐르던 시간이 급히 멈추자, 풍경이 또렷해졌다. 벽돌 길 위에는 이제 매끄러운 금속 바닥이 깔려 있었고, 사람들은 반투명한 장치를 눈에 걸고 서로를 지나쳤다. 간판은 여전히 반짝였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호와 색조가 화면을 메웠다.


다시 손가락을 조금 더 움직였다. 세상은 또 한 번 요동쳤고, 건물은 더 높아지고, 하늘은 더 창백해졌다. 나는 몇 번이고 눈금을 오르락내리며, 마치 타임랩스 영상을 돌려보듯 세계의 미래를 훑어보았다. 나는 눈금을 잠시 멈춘 채, 화면 옆의 작은 패널을 열었다. 거기에는 ‘변수 설정’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손끝을 움직이자 수많은 매개값이 드러났다. 기후, 인구, 정치, 종교, 행성의 공전 주기까지. 심지어 '마법' 또한 매개값에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행성의 궤도를 살짝 바꿨다. 항성으로부터 조금 더 멀리, 아주 미세하게 거리를 늘려놓았다. 그러자 세계가 다시 흔들리듯 바뀌었다. 사계절의 길이가 달라졌고, 사람들의 달력에는 새로운 월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축제가 옮겨졌고, 농작물의 수확 시기도 변했다. 단 한 칸의 차이가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다른 리듬 속에 두고 있었다.


나는 다시 패널을 조작했다. 제국의 국경선을 따라 표시된 작은 깃발 중 하나를 꺼내, 옆으로 밀어냈다.


‘변경백 영지 침략 시뮬레이션’


즉시 화면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북쪽에서 넘어온 유목민 기병대가 국경을 넘어 들이닥쳤고, 성벽은 견고했지만 기동력을 활용한 포위 작전으로 성 안은 서서히 말라죽었다. 짧은 시간 안에 지도가 새롭게 색칠되었다. 그곳에 존재하던 영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제국의 경계선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나는 한동안 변화된 세계를 바라보았다. 작은 선택 하나가 도시의 풍경을 바꾸고, 한 줄기 변수 조정이 왕조의 운명을 흔들었다. 마치 거대한 장난감 상자 속에서, 세계가 내 손끝에 따라 요동하는 듯했다.


나는 동일한 시간축을 다시 설정하고, 화면을 둘로 나누었다. 왼쪽에는 침략이 없었던 세계, 오른쪽에는 침략이 있었던 세계가 나란히 펼쳐졌다. 같은 시간, 같은 세계였지만 풍경은 전혀 달랐다.


침략이 없었던 세계는 여전히 제국의 깃발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의 권위는 굳건했고, 다만 귀족정은 상원과 하원으로 이뤄진 의회민주주의로의 이행이 혁명없이 천천히 진행되었다. 영토는 분할되었지만 국경간 무역은 발달했고 과학 또한 현재의 모습처럼 발전했다.


반면 국경의 붕괴가 일어난 세계는 달랐다. 귀족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시장은 스스로 성벽을 지켰다. 사람들은 더 이상 황제의 명령만 따르지 않았다. '권리’와 ‘자치’라는 단어가 조금씩 거리를 메우며, 도시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혁명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산업화 또한 80년을 앞서 발전했다. 아동노동착취는 만연했고 자원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가 태동했다.


나는 한동안 두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단 하나의 차이가 수백 년 뒤의 세상을 완전히 갈라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의 흔적을, 또 하나의 버전으로 저장했다.


나는 커피테이블 위에 테블릿을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수백 년을 훑던 손끝이, 이제는 조용히 멈춰 있었다. 창밖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섞여, 이곳은 여전히 평범한 하루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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