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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 여자 Apr 09. 2020

제목을 입력하세요.

#에세이 11

'제목을 입력하세요.'라는 하얀 백지 위에서 손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에 대해 써야 하고 어떤 제목을 붙여야 적절할지 떠올려보면 머릿속은 같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내 나이는 서른두 살이다. 이제 막 계란 한 판을 넘어선 나이였고, 지리멸렬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주인을 제대로 잘못 만난 가여운 육체를 가진 남성이다. 또, 고된 일을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으며 그저 내가 가진 하루의 당면한 일을 겨우 헤쳐나가는 노동자이다.


나는 왼손잡이이다. 왜 오른손잡이가 아닌지, 어째서 이쪽 손이 모든 게 수월한지 알 수 없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편하면 좋은 것인 줄 아는, 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한다. 은유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 감성과 맞아떨어져 그런 것을 찾아보는 편인데, 아마 직설적이지 못한 내 성격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터지고 부서지는 것들은 좋아하지 않고 담백하고 무거운 것들 쪽에 더 눈이 간다.


육체단련과 책 읽기, 글쓰기가 취미이다. 퇴근 후엔 쇳덩어리를 들고, 나르고, 던지고, 뛰고, 구르고, 기어 다닌다. 노동의 땀과 단련의 땀은 그 향과 모양이 다르고 이것에 큰 매력을 느낀다.


이런 일과 운동의 단순한 반복에 몸은 인이라도 배겼는지 덕분에 한가한 머리는 세상 오만가지 것들을 기웃거린다. 그렇게 기웃거리며 뒤적거린 것들을 체력단련을 끝낸 뒤 귀가한 후 천천히 써 내려가 본다.




극과 극의 취미를 가진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무거운 것들을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과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쓰는 것이 겹쳐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 역시 겹쳐지지 않았지만 과분하게도 의심 없이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


삶과 생이 내가 들어 올리는 저 쇳덩이보다 몇 곱절은 더 무겁다는 걸 아는 사람이고, 사랑을 노래하는 것에 부끄러워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현실적으로 심장까진 잠시 고민하겠지만, 간 정도는 쉽게 내줄 수 있다. 하얀 백지 위에 '나'를 적어봤지만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아 제목을 정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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