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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 여자 May 17. 2020

'술'하면 떠오르는 것 - 1

#에세이 24

무역회사에 다닐 때가 있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내 첫 사회생활의 시작이므로 내 머릿속에 꽤 오래 기억될 듯하다. 첫 월급은 세후 160만 원이었다. 월급날 통장을 확인해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당시 월마다 16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굶어 죽지 않을 것 같았다. 회사생활은 영원할 것 같았고, 나 역시 뼈를 묻겠다 생각했다. 회사에서 정해진 법적 근무시간은 주 5일이었지만 남들과 마찬가지로 주 6일에서 가끔 씩 7일도 일했다. 그것이 나를 위하고 나를 품어준 회사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밤늦은 회식자리에선 소주잔을 들어 충성을 맹세했고, 다음날의 사무실에선 얼굴에 홍조가 핀 높으신 분들에게 숙취해소제를 돌리며 얼굴 도장을 찍었다. 그것이 회사일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능력이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다.


규모 꽤나 있다는 요즘의 회사들은 문화회식이라며 영화나 연극, 뮤지컬을 보기도 하고 회식을 시작해도 1차에서 끝날뿐더러, 술을 강요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10년 전의 내 출근도장을 찍은 사무실은 전날의 술자리에서 나눴던 잡담을 복습하며 시작했고, 피곤함에 질질거리던 퇴근길은 해장술이라는 것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알코올로 엮어진 뫼비우스의 띠에서 회사생활의 시작과 끝은 술이었다.


5년 전에 직장을 그만둔 나는 무역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한다. 개인적인 일이고, 직종은 함구하려 한다. 비밀이 많아야 글과 문장의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누군가의 조언 때문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난 그만뒀다. 이젠 정장과 넥타이보단 현장복이 한결 편하고, 서류 뭉탱이와 팬이 널브러진 책상과 무거운 공기가 낮게 깔린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불을 내뿜던 프린트기의 인쇄 소리, 사이사이의 먼지 낀 키보드와 그 옆의 머그컵에 담긴 싸구려 커피의 모습들은 이제 잊힌 지 오래다. 이것과 같이 잊힌 것은 술이었다.


개인적인 일을 하다 보니 술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초반에는 버릇이 남아있어 과음한 날이 종종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듯한 세상과 같이 내 속도 돌아가며 피해는 몸과 회사로 전해졌다. 전날 술을 마시고 출근한 날은 회사도 그 취기가 남아있는 듯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피해의 파장이 내 몸과 회사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술을 점점 멀리했고, 지금의 거의 끊다시피 했다. 그러며 충성은 국가에게만 해도 충분하다 느꼈고, 값비싼 숙취해소제에 손이 가는 날이 없어졌다.


축하와 슬픔의 자리엔 늘 술이 빠지지 않는다. 개인과 조직은 알코올 속에 깊게 잠겨 있었고, 배회하는 늦은 밤의 번화가들은 알코올의 홍수였다. 문제와 고민을 위한 지혜의 덕담보단 혀를 차며 기울이는 술 한잔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생각한다. 가끔 누군가의 덕담보단 친구와의 속 깊은 이야기와 술 한잔이 더 값질 수는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절대 술에 의지해선 안 된다. 술은 알코올이고 액체이며 그것으론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타협하지 못한다. 술이 가득 찬 잔을 볼 때 난 늘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어떤 문제란 것은 기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더 심한 국가도 분명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역시 술에 관대한 민족이다. 어딜 가나 술을 빠지지 않고, 술이 빠지면 그 자리는 심심한 자리라 생각한다. 술에 취해 일으킨 범죄는 심신 미약이라는 이유로 감형된다. 술을 마신 뒤엔 본인 스스로가 아니었다는 말에 묻고 싶다. 술을 들고 붓던 손모가지와 아가리는 누구의 것이냐고 말이다. 누군가의 죄를 사방에 널려있는 술병들이 보호해 준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는 죄인은 술독에 숨었고, 신비하게도 형법 10조에 자세히 나와있다. 서술된 심신 미약이라는 것을 무조건 술과 연관 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판결된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보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법과 관련된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술 따위가 사람의 목숨이나 재산보다 위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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