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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 여자 May 21. 2020

북어조림은 맛있다.

#에세이 25

초등학교 3학년쯤, 나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맡겨질 때 몇 밤을 자면 데리러 오는지 물었다. 엄마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빠는 미닫이 문 너머에서 서성였다. 돌보지 못해 자신의 부모에게 자식을 맡기는 내 부모의 마음을 난 알 수 없었다. 기억 속의 그 광경은 기괴하고도 처참했다. 찢어지는 가난은 혈육마저 찢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온몸으로 알았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할머니는 늘 혼자셨다. 단신이었고 표정은 온화했다. 말수가 적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고요한 할머니의 집은 높은 언덕의 좁은 골목길 사이에 있던 다 쓰러져 가는 집이었다. 집 앞엔 노상방뇨 금지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데, 그 위에까지 올라가 바지춤을 내릴 사람은 없어 보였다.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열면 부엌과 연탄구멍이 보였다. 바닥은 회색 시멘트 그대로였다. 하얀 창호지를 바른 문을 열면 단칸방이 있었다. 할머니의 살림은 체구와 같이 검소했다. 작은 방에는 낡은 텔레비전과 냉장고, 장롱, 달력이 끝이었다.


할머니는 작은 방 안에서 내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내가 학교에 갈 때, 준비물을 챙길 때, 신발을 신고 옷을 입을 때, 무언가를 물어볼 때, 형제들과 부모들을 떠올리며 울 때와 텔레비전을 보며 웃을 때, 자려고 누웠을 때 등 내 모든 때에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 향해있었다. 왜 늘 쳐다보냐는 심통 섞인 물음에 할머니는 내 모습에서 어린 시절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아빠는 남매 중 막내였고, 나는 형제 중 막내였다. 이런 상황의 아빠를 이해해야 하고, 내 부모를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 가끔 길도 모르고 집에 간다며 성을 낼 때 땅콩 캐러멜을 주시곤 했다. 입안에서 질퍽거리던 캐러멜의 단물은 상황과 이유 그리고 집을 잊게 했다.


나는 할머니의 북어조림을 좋아했다. 다른 반찬들 사이에서도 빨갛게 윤기가 돌아 먹음직스러웠다. 내 젓가락은 늘 그곳으로 향했다. 숟가락 위에 하얀 쌀밥을 잔뜩 퍼올린다. 그리고 북어조림을 올려 입에 욱여넣으면 달달한 쌀밥과 북어조림의 짭조름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섞여 혀 위를 두들겼다. 맨입으로 먹어도 맛있었다. 할머니가 밖에 나가면 냉장고를 열어 비슷하게 생긴 반찬통들을 뒤졌다. 북어조림을 맨손으로 집었을 때, 그 맛은 촉각에서 미각으로 전해져 침은 알아서 솟구쳤다.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다그치지 않았다.


다 커서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할머니의 그 북어조림은 정성도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명태를 말리면 북어가 되는데, 뻣뻣하고 깡마른 그것은 다루기도 쉽지 않았다. 먼저 물에 3,4시간을 불린 뒤에 건져서 빨래방망이로 한참을 두들긴다. 그렇게 퍼지고 헤진 것을 토막 내어 냄비에 담아 간장과 양념, 무, 청양고추를 조금 넣고 푹 조리면 된다고 했다. 그런 수고에도 반찬통에 수북했던 북어조림을 떠올려보면 할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따라 해도 그 맛이 안 난다는 엄마는 나와 같이 입맛을 다셨다.


내가 19살 때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8월의 한 여름이었고, 입대한 큰 형의 첫 면회날이었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마주한 형은 북어처럼 새까맣고 깡 말라있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엄마의 음식들과 형이 평소 좋아하는 치킨과 피자가 상 위에 펼쳐졌지만, 형은 입맛이 없다며 먹지 않았다. 잔칫상 위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 낯설어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말인 고속도로는 휴가철과 겹쳐 늦은 밤에나 뚫린다고 라디오는 전했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때, 아빠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날 뒤로 할머니의 북어조림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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