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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 여자 May 31. 2020

영화관은 빈자리가 많을수록 좋다.

#에세이 27

새벽에 홀로 영화관에 간다. 백화점 사이에 있는 곳으로 인천에서는 꽤 규모가 크다. 지하 3층과 지상 10층 높이로 영화관은 7,8,9층을 연이어 사용하고 있다. 상영관도 많아 인기가 많다. 상영관에는 가로로 넓게 펼쳐진 하얀 스크린이 관객을 압도적으로 감싸 안았다. 그런 곳에 혼자 있는 기분은 전세 냈느냐 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어느 감독의 시사회에 단독으로 초대받은 느낌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대기업이 완벽하게 장악한 영화관과 배급망 때문이다. 촘촘하게 엮인 자본의 이해관계 속에서 눈여겨 볼만한 외화는 스크린으로 만나기 쉽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원하면 틀어는 드릴게.' 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상영관이 거의 없고, 있어도 대부분 새벽이나 늦은 밤에나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난 조용하게 보는 것을 좋아한다. 윙윙거리는 휴대폰의 진동, 까슬 거리는 팝콘과 잔에 꽂힌 빨대소리, 속삭이는 작은 대화와 짧은 감탄사 등 영화 속 외의 모든 소리에 예민하다. 가끔 과하다라는 자성을 해보지만 수많은 빈자리에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를 느낄 때,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내 눈과는 반대로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가득한 빈자리의 극장은 나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게 했다. 따뜻한 색은 파란색이라는 어느 여성, 침묵하는 신의 목소리를 찾아 떠나는 두 신부, 바그다드에 있다는 어느 카페, 드럼에 미친 학생과 알고 보니 진짜 미쳐있던 교수, 할머니의 노령연금을 타 먹는 어느 가족 등 어디로 흐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의 삶과 인생은 주름 없는 넓고 하얀 스크린에서 펼쳐졌다.


수많은 영화 중 늘 기억에 남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내 기억 속 제목은 블랙스완이었다. 블랙스완.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2010년 작이다. 나탈리 포트만, 밀라 쿠니스 그리고 뱅상 카셀 주연의 스릴러물이다. 개봉 후 그 해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등 수많은 상을 휩쓴 영화인데, 그만큼 굉장히 강렬했다. 발레작의 대표격인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 역 자리를 놓고 주인공들의 치열한 경쟁과 심리적 압박을 화려한 영상미로 표현했다. 참고로 청소년 관람 불가이다. 이 강렬한 영화에 비해 10년 전 내 기억 속 그날은 처참했다.


난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첫 여자친구와 관람했다. 23살과 20살이던 우리는 대학교 때 만났다. 전역한 지 별로 안된 나는 까무잡잡했고 학교를 낯설어했다. 그 친구는 키가 작았고 머리카락이 유난히 곱슬이었다. 웃을 때 홍조 띤 양쪽 볼 위로 깊게 파인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깊은 가을날, 고백과 승낙의 과정을 거친 뒤 첫 데이트였다. 각자의 집에서 서로의 중심이었던 영등포의 타임스퀘어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전날 연애를 처음 해보는 나는 친구들에게 이성과 처음 만나면 무얼 하는지 문자를 돌렸다. 울리는 휴대전화기는 만장일치로 영화였다. 인터넷을 한참 뒤져봤다. 나의 선택은 까다로웠다. 먼저 재미가 있어야 했다. 감동도 있어야 했고, 눈을 뗄 수 없는 영상미가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첫 만남이니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 조건에 맞는 것은 당연히 블랙스완이었다.


곱슬머리 친구도 영화관람에 동의했다. 하지만 블랙스완엔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는 임창정, 김규리 주연의 사랑이 무서웠을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 유행이었던 로맨스 코미디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그걸 봤어야 했다. 하지만 난 우겼다. 작품성 있는 영화가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영화는 돈 아깝다는 편견 잡힌 소리를 덧붙였다. 또다시 이야기하지만 그때 입을 틀어막았어야 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영화는 청소년 관람 불가였다. 상영관 안의 객석은 꽤 비어있었다. 수위가 굉장히 높았다. 스크린의 불빛에 비친 여자친구는 인상을 붉혔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당시 눈곱만큼의 눈치도 없던 나는 스크린에 빠져있었다. 그것이 내 첫 연애이자 첫 데이트의 끝이었다. 며칠 뒤 헤어지자는 문자를 통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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