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 벌레이야기를 읽고
현대는 믿음을 강제하지 않는다. 과거보다 둥글어진 분위기 속에서 포교의 손은 널렸고,
순수한 신앙심이 아닌 금전적 이익을 위해 간절한 사람의 손을 낚아채는 이들이 생겼다.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한 ’잘못된‘ 종교의 민낯을 보면서,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는 이들을 거북하게 느꼈다.
소설 「벌레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도 이 거북함을 느꼈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신체 부분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아이가 자신의 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알암이의 엄마',
즉 '아내'는 아들 '알암이'를 죽인 범인을 제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범인이 범행을 자백하게 되면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법과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아내의 애달픈 복수를 가로막았다.
아내는 그를 향한 복수심으로 자신을 지탱했고, '김집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복수심에 불타는 아내는 처음에 김집사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 했다.
범인을 용서하라느니, 자신을 위하라느니, 아이 잃은 엄마에게는 통하지 않을 말이었다.
'인간적으로' 아내의 원통함과 복수심을 가려내고서 알암이의 죽음을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김집사의 말은 화가 날지언정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들이다.
범인은 범행을 자백했기에 당국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시작했고,
그런 그에게 식칼을 들고 찾아가봤자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될게 뻔하다.
결국, 아내는 김집사의 말에 점차 귀를 열었고 자신의 복수심을 잠재우거나 범인을 용서할 목적이 아닌
알암이를 위해 교회를 찾아다녔다. 아내는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
아내는 아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믿었고, 입으로 신을 담으며 신앙심을 키워갔다.
김집사는 투철히 신앙심을 키우는 아내에게 범인을 '용서'하라 간곡히 당부했다.
자신의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 용서는 진정한 용서일까?
과연 알암이의 죽음을 눈으로 덮는 게 가능할까?
아내는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가겠다는 마음을 굳혔고, 위의 물음에 긍정적인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아내는 굳건한 마음으로 교도소를 다녀왔지만, 위의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범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아내는 무너져내렸고, 아내는 김집사와 다시 부딪힌다.
김집사는 "알암이 엄마, 그 사람은 애 엄마 앞에서 그렇게 뻔뻔스러워 그런 얼굴을 한게 아니에요. (중략) 그 사람은 영혼 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있었던 거예요"(p.74)라고 말하며 범인을 '대변'한다.
또한, 주님이 범인을 용서했다면 우리도 범인을 용서해야 한다며 아내에게 치명타를 날린다.
그렇게 논쟁은 끝이 났고 아내는 김집사의 말 때문에 용서의 대상과 권리를 잃었다.
아내는 범인의 교수형 집행 소식을 라디오로 듣게 되었다.
"이제 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제 육신의 일부는 이 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눈과 신장을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맡기고 가니까요.", (p.80~81)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p.80~81)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범인 김도섭의 단말마이다.
듣는 아내로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끝까지 고통스러워야 할 범인이 신을 앞세워 구원을 바랐고,
유가족의 감정을 들먹이면서까지 자신을 위해 기도할 거라는 말까지 했다.
이 무시무시한 단말마는 아내를 자살로 이끌었다.
김집사의 말과 범인의 단말마를 미루어보았을 때, 아내가 자살을 택한 이유는 명확해진다.
아내는 김집사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범인을 향한 복수심으로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사회는 사적인 복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김집사는 신앙심을 통해 아내의 복수심을 내려 앉히려 했고, 동시에 범인을 용서하길 당부했다.
그렇게 아내는 제 아이를 위한 선금과 기도, 범인에 대한 용서를 위해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 용서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범인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고,
신체 일부를 기증하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이 고통은커녕 구원을 바란다니,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교도소에서 무너진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 김집사와 설전을 벌였지만,
결국 아내가 용서하고자 하는 대상과 마음을 신에게 빼앗겼다.
범인을 용서하겠다는 큰마음은 무너졌고, 아내의 삶도 무너졌다.
라디오로 듣게 된 범인의 단말마를 끝으로 아내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아이도, 복수할 범인도, 그 범인을 용서할 권리조차도.
이 모든 것을 잃은 아내는 자신의 목숨마저 버렸다.
김집사가 신을 입에 담으며 아내의 복수심을 잠재우는 데 그쳤더라면,
용서를 당부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김집사의 말을 이용하기 좋게 바꾼다면
'누구든 신을 받들면 범죄를 용서받거나 큰 죄를 저지른 범인을 용서할 수 있다.'라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김집사의 말이 옳을지언정,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세상 모두가 신을 받들거나 종교를 믿지는 않는다.
신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열렬히 숭배하는 사람도 있다.
아내의 경우 전자, 김집사의 경우에는 후자이다.
종교는 말 그대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집사는 이 불가능의 영역을 침범하려 했다.
김집사는 신을 부정하는 아내의 마음을 ‘신’을 통해 구원하려 했지만 오직 자신의 마음만 강요하며,
절박한 ‘인간’의 감정에 무너진 아내를 짓밟았다.
같은 ‘인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녕 신의 뜻을 설파할 수 있을까?
읽은 책 / 이청준. (2013). 벌레이야기. ㈜문학과지성사. 해당 책을 인용할 때는 페이지 수만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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