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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Jun 13. 2022

방파제에서




만화 극락왕생에서 마음에 박힌 구절이 있다.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마 평생 가슴에 바다가 있을 것이다.


-이 순간을 아마 나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이 순간으로 아마 나는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구절이 나한테는 순간을 말하는 거 아닐까 싶은 날이었다.








제주, 삼양



바다를 지척에 두고 살 때에는 귀한 줄 모르고 육지로 떠나보니 바다를 보고 싶은 갈증이 점점 커져갔다.


그래서 고향으로 휴가를 가면서도, 하루는 꼭 바다만 보고 싶어서 욕심내어 오션뷰 호텔을 예약했다. 무조건 바다가 제일 잘 보이는 곳으로.



기대를 가득 품고 들어간 숙소는 창이 아주 컸.

창 한가득 들어찬 파란 바다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어쩐지 숨이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유리 한 장 밖의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대낮의 새파랬던 바다는 해가 저물며 주황빛으로 물들었다가 해가 꼴깍 넘어가고 잠시 보랏빛을 비추더니 한 밤에는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칠흑으로 모습을 휙휙 바꾸었다.



캐논 슈어샷 텔레맥스, 코닥 울트라맥스400, 체크인하고 방에서 본 방파제


해질무렵의 방파제








15년도 전에 교복 입고 누비던 오래된 길거리들을 터덜터덜 걸으며 푸딩을 사 먹고, 서점에 가 책도 사고, 관광객처럼 줄 서서 야시장의 먹거리도 사는 재미도 있었지만


오롯이 바다만 보던 반나절의 시간이 이 여행의 가장 백미였다. 호텔 방에 홀로 앉아 불을 꺼놓고 오징어잡이 배가 멀리 떠있는 까만 바다를 구경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조명이 방파제 근처까지 빛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다. 그 빛에 기대 고요하게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오랜만에 아무 상상도 하지 않고 감상을 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득 차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바다를 보다가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까지 바다를 보며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지금 잠든 방에서 똑같이 창 한가득 바다가 보이는 꿈.
얼마나 좋았으면 꿈에서도 그대로 나왔을까,

시원하게 창 한가득 보이는 푸른 바다에 큰 고래들이 신나게 물장구치며 놀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롭고 기분 좋은 광경이라 꿈에서도 나는 사진을 찍어댔다.



어렴풋이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새벽, 눈을 뜨고 꿈에서 깨어도 그 바다가 그대로 보여서 너무 행복했다.
어제 본 바다와 꿈에서 본 바다와는 또 다른 새벽 어스름의  바다를 느리게 꿈뻑이며 바라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방에서 찍은 방파제. 한결같이 고요하다.






주에 도착 전, 집이 코앞인데 뭐하러 호텔에 가냐던 엄마는
"엄마, 나 바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라는 내 말이 진실되게 와닿았는지 두말없이 그러라고 했다.

다음 날 데리러 온 엄마가 내 머리를 쓸어주며  "딸아 좋아하는 바다 실컷 보았니?" 하고 물어보아 준 것까지가 이 일정이 완벽하게 좋을 수 있었던 마침표였다.



긋하게 크아웃을 하고

탁 트인 방파제 길을 걸으며 쨍한 햇볕과 아직은 조금 시원한 바닷바람의 냄새를 만끽했다.

지난밤의 꿈을 떠올리니 절로 콧노래가 나오 기분이 너무 좋아 로또를 사야겠다 생각했다.



로또 사야지, 생각할 때 본 광경




그리고 대망의 토요일, 나는 생전 처음 5만원에 당첨되었다.
단 돈 5만원이지만 이 꿈이 좋은 꿈이었다는 증명이 된 것 같아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이미 그 꿈을 꾼 것만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기분을 충분히 가졌으니 그걸로 이미 그 꿈은 역할(?)을 다 했다.



좋은 꿈을 꾸면 왜 로또가 사고 싶어 질까.
나는 이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5만원에 당첨된 이야기라고 하지 않고,

진짜 좋은 꿈 꿨던 이야기라고 말한다.

소에는 주로 귀가 찢어질 듯 시끄럽거나 온몸이 경직되도록 긴장되는 꿈을 주로 꿔서, 다른 종류의 꿈을 꾸는 것은  글로 수집해둘 만큼 드문 일이다.



올해 여름 이렇게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니콘d40, 함덕 해수욕장


니콘d40, 삼양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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