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겹겹
시아버지의 칠순 기념 제주도 여행을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나의 친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푸른 제주 바다를 꿈꾸며 들떠있던 여섯 살 아들에게, 우리 가족에게만 생긴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해야 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린 마음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의 그림자였다.
할머니와의 따뜻했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매년 생일마다 사주신 케이크, 보들보들 미역국, 손 잡고 걸었던 길.. 하지만 슬픔에 잠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외동딸로서 부모님의 곁을 지키고 그분들의 무너지는 마음을 보듬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평생 든든하고 커 보였던 부모님이 그토록 연약한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을 가까이서 보며, 이제는 내가 그분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손녀로서의 슬픔은 외동딸로서의 책임감 뒤편으로 잠시 미뤄두어야 했다.
장례를 마치고 뒤늦게 제주도 가족여행에 합류했다. 여행을 취소하거나 미루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몇 달 전부터 계획된 대가족의 일정에 차질을 주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제주 여행을 손꼽아 기다려온 아이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도 컸다. 가라앉은 마음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지만, 시댁 식구들의 따뜻한 위로와 배려 덕분에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정 변경으로 우리 가족에게만 주어진 반나절의 자유시간, 함덕 해변을 거닐며 파도 소리를 듣고, ‘걸어가는 늑대들’ 전시를 보며 홀로 할머니를 추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준 남편의 배려 덕분이었다. 문득 찾아간 작은 책방에서 마주한 문장들은, 애써 다잡았던 감정의 둑을 무너뜨리며 위로를 건네주었다. ‘할머니를 잃은 내가 지금 시댁 식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손녀와 며느리, 엄마라는 여러 역할 사이에서 요동치는 감정들은 혼란스러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혼란 속에서 잠시나마 오롯한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뒤를 따르셨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던 고모는 이미 오랜 간병으로 기력이 쇠한 상태였고, 결국 병원에 입원하였다. 또다시 부모님의 곁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죽음이라는 낯선 그림자가 드리우자, 아이는 이전과는 다르게 그 의미를 어렴풋이 인지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엄마로서, 한꺼번에 밀려온 죽음의 의미가 아이에게는 조금은 흐릿하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써 의연한 태도를 보이려 노력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돌아와, 텅 빈 부모님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고모에게 나는 유일한 조카였다. 고모의 입원 수속부터 퇴원 후 여러 과의 협진, 앞으로의 치료 계획까지 알아봐야 할 사람은 오롯이 나였다. 보호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면을 알아보고 뛰어다녔다. 내가 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부모님의 몫이 되기에, 지친 부모님께 그 짐까지 얹어드릴 수는 없었다. 하루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빈집에서, 하루는 우리 집에서 번갈아 잠을 청했고, 아빠는 2~3주 동안 회사에 출근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하며 손녀로서 느꼈던 사무치는 슬픔. 부모님의 슬픔을 보듬고 곁을 지켜드려야 하는 외동딸로서의 묵직한 책임감. 그 슬픔 속에서도 가정을 돌보고 남편과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 시댁 가족에게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며느리의 자리. 그리고 고모의 유일한 조카로서 보호자 역할을 수행했던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까지. 숨 가쁘게 여러 가면을 번갈아 써야 했다.
큰 슬픔 속에서 나의 여러 가지 역할들 뒤에 가려져 있던 '나'는, 할머니 부고로 경조 휴가 5일을 쓰고 복귀한 지 이틀 만에 다시 경조 휴가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눈치껏 사흘만 쓰고 회사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겨우 존재를 드러냈다.
2025년의 4월은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을 소화해 내기에 너무도 버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경험들을 통해 깨달았다. 내가 가진 이 모든 역할들이 결코 '나'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역할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무게감들이 앞으로 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할지 조용히 제시해주고 있음을.
나는 엄마이고, 아내이고, 외동딸이고, 손녀이고, 며느리이고, 조카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름들 속에서, 마침내 나를 찾았다. 이 모든 이름들을 품고 살아가는, 바로 '나'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