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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un 26. 2023

끔찍한 질문

그만 먹기 위해, 그만 자기 위해 쓰는 글

뭘 쓰려고 이러는지, 나라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잠을 자기 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오늘도 글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은 공부할 거야, 하며 각오만 하던 청소년 때와 같이. 오늘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본다.     


어제 이모네를 다녀왔다. 많은 음식을 대접해 주셨고 나는 많이 먹었다. 집에 와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많이 먹어놓고도 무엇이 불만족스러운가? 많이 먹는 이유는 어쩌면 마음의 무언가가 부족해서인가?’ 왜냐면 이모네서 쉼 없이 먹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로 김치찌개, 오렌지주스, 뻥튀기 과자, 수박, 점심으로 삼겹살, 집 오는 길에 접시뻥튀기, 옥수수, 집 와서는 부침개에 옥수수에 토마토. 안 먹는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만족하고 ‘그만’을 외치지 못했다. 부침개 먹으면서는, 내가 이걸 한 장 더 먹는다고 기분이 좋을까?, 아닐 것 같다고 묻고 답했다. 이렇게까지 먹는 내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된다. 마음의 문제가 생길 때 몸을 움직이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고민이 있는 사람에게 집 안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오늘날 내가 과하게 먹는 것은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마음이 말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오늘 아침엔 일찍 일어나겠다는 계획을 어기고 느지막이 일어났다. 늦게 일어난 것에 후회했고 자책하다가 변명하듯 내가 일찍 일어날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백수라서 어디 출근할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일찍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지도 않는데, 난 왜 일찍 일어나야 하나. 아니 일찍 일어나려고 할까.  

   

없다.

일찍 일어날 이유도, 음식을 적게 먹어야 할 이유도.     


그렇게 혼잣말로 질문하고 답하다가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당도하자, 끔찍했다. 이 질문은 지난 몇 년간 날 허무함과 무기력으로 이끌었고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엔 병들게 만들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왜 살아야 하는가>를 읽고 답을 얻고자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방송에 정신과의사가 나와 한 말이 떠올랐다. 불안할 땐 뇌의 전두엽을 자극해야 불안을 없앨 수 있다. 전두엽을 자극하는 방법에는 걷기를 포함한 운동과 감정을 일기로 쓰는 방법이 있다. 그래서 걸었다. 러닝머신의 전원을 켜고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결론이 났다. 일찍 일어날 이유는, 그래야 ‘내가’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으며 시간을 주도적으로 사용한다는 생각과 계획대로 행동한 뿌듯함이 있다. 음식을 적게 먹고 살을 빼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내가’ 나를 바라볼 때 ‘예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독하게 살을 빼겠다는 게 아니다. 과식하지 않고 적당히 먹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에 집착하지 않을 때, 음식이 차지했던 영역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하루를 풍성하고 다양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나의 행복에 대해 소소한 노력을 기울일 때 삶의 의미라는 걸 찾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나만의 즐거움과 재미가 곧 삶의 의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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