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뒷모습만 보는 나 - 내면의 균형이 필요하다
공원에 가면 운동할 수 있게 트랙이 그려져 있다. 요즘에 가니 예전과 다르게 ‘뛰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예전과 다르게 저녁에 공원을 가서 그런가, 이제 뛰는 문화가 정착된 건가 모르겠지만, 도서실에만 박혀 있어야 했던 나의 청소년 시절과 다르게 오늘날 청소년은 저녁마다 공원에서 뛴다. 중학생 여자아이가 뛰고 젊은 성인 남자가 뛴다. 봄에 아침, 낮에도 공원에서 뛰던 할아버지가 여름인 지금 저녁에도 런닝 바람으로 뛰신다. 직장에서 퇴근한 중년 여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고 부부가 나란히 빠른 걸음을 걷기도 한다. 나처럼 엄마와 걸음을 걷는 모녀도 봤다. 난 빨리 걷지 못하기에 보는 게 많다. 주인과 나온 강아지도 봤고 엊저녁에 내린 비에 트랙에 나와 있는 지렁이도 보았으며 보름달을 봤고 사람의 손을 피하고 싶어 최대한 트랙 바깥으로 걷는 길고양이도 봤다.
걸으면서 많이 보이는 건 또 있다. 사람의 뒤통수. 나를 제치고 모두 빨리 간다. 이야기를 나누는 게 목적인 커플도 나를 앞질러 가고 5살짜리 여자아이도 나를 스쳐간다. 아프지 않았던 시절, 그때 트랙을 걸으며 옆사람, 앞사람과 경쟁한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그들보다 빨리 걸었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앞지르면 이겼다는 묘한 쾌감이 들었다. 그들은 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경쟁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나보다 느린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이 걸으실 때 나처럼 천천히 걷지 않냐고? 어르신들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목적이 운동하려고 공원에 오신 것이기 때문에 걸을 때 힘껏 걸으신다. 그래서 나처럼 천천히 걷는 어르신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천천히 걷는 난,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어슬렁대는 한량으로 보일까, 저리 느리게 걸으니 운동 효과가 없지 싶을까, 뚱뚱한 이유를 알겠다 싶을까. 젊은 사람이 매일 걸으러 나오긴 하던데 빨리 못 걷는다고 이미 분석을 끝내진 않았을까. 무엇이 답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고 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묻지 않은 것은 내 안에 ‘이상한 걸음’이라는 부정적인 답이 내려져서다. 묻는 의도 안에 답이 내포되어 있으니 굳이 사람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보면, 젊은 화가는 그림에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론가의 평을 듣는다. 그 뒤로 사람들은 화가의 그림에 평론가의 말을 옮겨 담아 깊이가 부족하다고 떠들어댄다. 그 탓일까. 화가는 깊이가 무엇인지 찾고, 깊이에 집착하며, 자신에겐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화가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려다가 자신을 구렁텅이에 몰아넣었고 그것은 죽음의 길로 안내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만 피우는 것도 문제를 낳지만 이 소설에서 말하듯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는 것도 문제다. 어느 정도는 주변의 말이 안 들리도록 귀 닫아야 한다. 깊이가 없다는 말에 휘청이지 않고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면 그녀는 죽음에 이르지도 않고 언젠가는 자신의 깊이를 찾지 않았을까. 외부의 소리도 받아들이면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내면의 균형이 중요하다.
내면의 균형.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고 걸으며 내 걸음이 느리다는 사실을 계속 자각한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균형을 맞추려 이렇게 말한다. ‘좀 느리면 어때? 걸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지. 뛰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듯 나도 헐떡거리며 느리게 걷는 거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오늘도 걷는다.
오늘은 어떤 뒷모습을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