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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an 15. 2021

이게 내 탓이라고요?

소준철, <가난의 문법>


30대가 되면 어떤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10대에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때 보고 들은 것이 미래를 상상하게 했다. 30대가 되면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구두에,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향수 냄새도 나면서, 자동차를 타고 출퇴근을 할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집을 소유하며 그렇게 지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30대가 된 나는 어떠한가. 향수는커녕 화장을 하지 않고, 운동화에 백팩을 멘다.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며 여전히 자립하지 못한 채 부모님과 함께 살아간다. 미래에 대해 상상했을 때 그것이 현실과 꽤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나의 중년, 노년기를 보고 들은 것으로 상상해 버렸다.


60대가 되면 돈만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좀 여유롭게 일을 할 수 있는 모습을.

그때서는 일이라고 하는 게 정말로 내가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현실이 될까. 내가 상상한 30대의 모습과 지금이 다른데도?



누군가 현실과 상상이 다른 것을 나의 '무능'이라고 말한다면 속이 쓰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가 운동화를 신고 다니라고 했던가. 누가 집을 소유하지 말라고 했던가. 누가 결혼을 하지 말라고 했던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할 수 있는 것을 무능한 너만 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네. 그 말씀 참으로 옳습니다." 인정!



그런데

진짜로, 정말, 100% 내 책임인가?

이 모든 사태가 '나'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나' 하나가 그렇게 큰 존재였던가. 인생을 좌지우지할 힘이 나에게, 언제, 있었던가.



예전 시대의 글들을 읽어보면 대개 사람들은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졌다. 신분제 사회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때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점점 운명이라고 하는 것들을 믿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인생은 꽤 많은 부분이 운명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내 의지로 바뀔 수 있는 부분... 있지. 그러나 그것 역시 '운'이 따라줘야 하는 것이다. 의지가 생기게 된 동기,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기회, 환경, 의지가 실현된 운. 그래서 나는 '나'라는 개인의 힘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나의 무능함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언짢아하며, 어쩔 수 없이, 인정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에 이르자,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도 그러하실 것 같다.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운명이 재활용품을 수집하게 만들었다. 우직하게 열심히 살아온 게 어리석었다고 말하며, 그것보다 더 머리를 써야 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처럼 이상한 사회가 어디 있을까. 열심히 살아온 게 왜 어리석은 일이 될까. 초등학생들이 열심히 청소를 했는데 그 청소한 공간에 지나가는 어른이 페인트를 뿌렸다고 하자. 그렇게 해서 다시 더러워진 교실이 되었다고 하자. 그럼 그걸 본 학교 선생님은 초등학생들에게 열심히 청소하지 않았다고 혼을 내야 옳은가? 아니면 열심히 청소했다고 칭찬해 주며 괜찮다고, 다시 기운을 북돋아주는 게 옳은가.  



오늘날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은 우직하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무능함을 탓하며, 재활용품 수집 현장의 문제점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재활용품을 수집하지 않는 현실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그러니 현실적으로는 재활용품을 수집할 때 좀 더 안전하고, 그리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가난한 노인이 일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에 더하여 은퇴 연령을 폐지하는 것도 제안한다. '노인'이라 불리는 계층은 60세 이상부터인데 세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안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유형들이 존재한다. 아직 일을 할 수 있는 노인,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노인, 경제적 여유가 없으며 건강도 악화된 상태의 노인 등 말이다. 그러니 나이가 65세가 되었다 해서 은퇴를 강요하는 건 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노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며 그들을 가난으로 내모는 일이다.



부모님의 나이가 은퇴 연령에 가까워지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아직 일을 더 할 수 있다며,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부모님에게 은퇴를 준비하라고 말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은퇴라는 게 그리고 일을 구할 때 일을 구하기 쉽지 않은 나이가 된다는 게 가난한 입장에서는 얼마나 서글픈 조건인지 피부로 와 닿는다. 부모님은 내가 생각한 노년기를 보낼 수 있을까. 열심히 살아오셨는데, 편안하고 여유로운 노년기를 보낼 수 없는 걸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햇살 좋은 날에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 카페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 신문을 읽는 모습. 책을 읽는 모습. 그러다가 점심을 먹고 바둑을 두고, 저녁엔 밖에 나가 외식을 하는 모습. 우리나라에선 왜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는 걸까.



이것이 개인의 탓이라 한다면, 좀 많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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