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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Feb 16. 2021

처음엔 질문이었다

김유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를 읽고


처음엔 질문이었다. 네가 나에게 묻지 않아서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나에게 묻지 않는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했다. 나라는 사람이 상대방이 묻지 못하도록 알게 모르게 행동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상대를 탓하기도 했다. 상대를 탓하는 게 괴로워 사실은 내 탓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도 시원히 해결되지 않았다. 질문은 관심을 나타낸다. 사소한 질문들은 상대가 나에 대해 관심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나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든다. 질문이 사라지자 나는 나를 사랑하기가 어려워졌다.



질문에 집착하기 전, 나는 상대의 말을 꽤나 잘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말했다. 너는 참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노력했다. 칭찬에 약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태도는 사라져버렸다. 예전엔 내 의견이 제대로 없어서, 남에게 전달할 나만의 생각이 없어서 그것이 마음이 안 들었다면 지금은 남의 말을 듣지 못해서, 나의 말만 내뱉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던 미덕을 왜 나는 잃어버렸을까. 그건 질문에서 출발한다.



상대가 나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자, 나는 이해관계를 내세웠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치사한 방법을 썼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치사했던 나를 보게 된 것뿐이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자, 내 말이 늘어났고, 그리고 상대의 모든 말들이 다 쓸데없는 말로 느껴졌다. '이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쓸데없이.' 그런 생각들을 많이도 했었다.



상대가 질문하고, 나는 그에 대해 답을 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새로운 답을 찾아가며 나는 새로운 나를 만난다. 그때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너의 관심도 느끼며, 너에 대한 고마움도 느낀다.



그러나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다.

내가 망쳤을까? 그들이 망쳤을까?

아무리 이해관계의 잣대를 들이대도 답은 없다.

결국 물음은 하나다.

외로운가?



외롭다면 나는 열심히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쉬운 게 없다면, 지금이 꽤나 만족스럽다면, 노력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이 사라진 지금. 한동안 나는 그것이 편하다고, 이제야 진실이 드러난 것이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진실을 마주한 나의 마음이란 시원한가? 여전히 허전하고 서운하고 섭섭한가?



정답은,

외롭다,다.

원망, 서운함, 섭섭함 그런 건 사라져버리고 딱 하나 남았다.

외로움.



쓸데없는 말이 사라진 후에야 알았다. 쓸데없는 말들 속에 진심이 담기기도 하고, 쓸데없는 말들 속에 진심이 만들어지기도 하며,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것을.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나누는 건 중요하다는 걸.

이해관계를 내세워 '너'를 기준으로 행동했었다. '나'를 기준으로 행동했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내가 그저 너를 좋아해서, 내가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 너는 아니어도 내가 좋으니까, 그렇게 '나'를 기준으로 말이다.



다시 다짐해본다.



쓸데없는 연락을 자주 해 보자고. 기죽지 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보자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에 대해 관심을 주고 묻고, 상대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자고. 그리고 일희일비 하지 말자고.


책 덕에 기죽지 않고, 이 글을 쓴다. 기죽지 않고, 다짐해본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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