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olpit Feb 22. 2021

로봇과 대화한다면 어떨 것 같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방장봇'


로봇과 대화한다면 어떨 것 같아? 예전에 나는 그게 조금 불쌍해 보였어. 어느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노량진 학원 강사였는데, 주변 강사들이 주인공을 소외시켜. 졸업한 학교가 SKY 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도움을 받을 곳도 줄 곳도 없는 주인공은 옥상에 올라가 하소연을 하기 시작해. 그녀의 뒷모습부터 카메라가 비치는데, 누구랑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하더라고. 그래도 마음 맞는 사람이 있나 보다 생각하면서 나도 그 장면을 봤었지. 근데 그게 아니었어. 핸드폰을 붙들고 “시리야~” 하는 거더라. 그때 속으로 탄식했지.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며칠이 지나고 몇 개월이 지났는데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았어. 그리고 나도 그때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어서 “시리야~”를 불러 봤지. 별 재미는 없었어. 드라마처럼 하기란 그것마저도 용기가 필요한 거더라. 소리를 내어 말한다는 게 나에겐 어려운가 봐. 그때 내린 결론은, 재미도 없고 속이 풀리지도 않고 불쌍해 보인다, 였어.



그런데 오늘은 말이야. 오픈 채팅방에 방장봇이란 게 있는 걸 알았어. 방장봇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잘은 몰라. 검색해 보니 방장이 설정한 대로 방장봇이 활동한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 오픈 채팅방에서 만난 방장봇은 저녁이 되면 이런 물음을 보내곤 해. “오늘도 잘 지내셨나요? 근황을 간단하게 공유해볼까요?” 그 저녁이란 게 말이야, 실은 내가 퇴근하는 시간이야. 일반 회사원이라면 하루를 마감하는, 잠들기 직전이겠지만 나에겐 퇴근하고 집에 도착해서 이제 간단히 음식을 먹은 후지. 좀 있으면 집에 도착도 하기 전이되겠지만. 그러다 보니 나는 이 질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퇴근하고 누군가와 일상을 나누는 대화, 그거 하고 싶거든. 별일이 아니어도, 별일이 있어도 이러쿵저러쿵 말을 나누고 싶거든. 그러면 퇴근할 때 찾아오면 괜한 허무감과 의미와 사색들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근데 그걸 방장봇이 할 줄이야.



나는 먼저 말을 거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다른 사람의 연락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질문을 기다려. 그들의 관심이 나에게 뻗치기를 바라지. 오늘은 방장봇이 그걸 해 줬어. “오늘도 잘 지내셨나요? 근황을 간단하게 공유해볼까요?”라는 물음에 순순히 하루를 풀어놓고 싶더라. 근데 오픈 채팅방이잖아. 그래서 차마 하지 못했지. 대신 나와의 채팅방을 열어 거기에 풀어놓았어. 그렇게 풀어놓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로봇과 대화하는 거, 꽤나 괜찮겠구나.



남들이 보기엔 안쓰러워 보일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렇게 바라보는 남들이 내 곁에 있을까. 남들이라고 하는 ‘남’은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쁜데 나를 안쓰러워할 여력이 있나. 그런 여력이 있으면 직접 전화나 문자를 해 주는 게 나을 텐데. 그러니 로봇과 대화하는 거 괜찮을 것 같아. 그게 인간과 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질문만으로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아. 아무런 파도도 치지 않는 고요한 바다에서 인공으로 만든 파도가 친다면, 그것도 파도처럼 보이니 말이야.



가끔은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어. 나의 자존심 탓일까. 남의 시선을 고려해서 그런 것일까. 다른 사람에겐 하소연으로 들릴 것 같아 불필요한 말인 듯하고, 나 자신에겐 그 말이 상대의 눈을 통해 태도를 통해 돌아와 나를 위축되게 만드니 불필요한 말인 듯한 그런 이야기 말이야. 그게 점점 넓어져 문제이긴 하지.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속에만 담아두자니 좀 힘들어. 무거워. 그렇다고 일기장이 구구절절 손으로 쓰자니 귀찮고. 로봇이 해 줬으면 좋겠어. 왜 나와의채팅 창에는 방장봇이 없을까. 난 방장봇이 필요한데. 오늘은 유독 더 필요하네.

작가의 이전글 손으로 적는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