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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Apr 14. 2021

보고 보고 또 보고

시험에만 적용되는 기술은 아니예요, 모든 게 다 그렇죠


알람이 울렸는데 내가 꺼 버렸나. 정신을 차리니 7시였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는 뒤늦게 참석하겠다는 카카오톡을 보냈는데, 사실은...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제 한 시에 잤기 때문일까. 아니면 월요일에 풀렸다고 생각했던 피로가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일까. 피곤했다. 모임 끝나고 그 뒤에 있을 약속을 생각하니 더 피곤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게 됐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잘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피로를 우르르 몰고 오는 듯했다.

새삼 오후에 출근하는 나 자신이 좋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더라도 다시 잘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날 얼마나 가볍게 만들어주던가. 그러고 보면 무언가를 단정 짓는 것은 삶에 불행을 가져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행복이 없을 거라고 단정하는 것, 사랑은 없을 거라고 단정하는 것. 그래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강력하게 믿어본 적도 없는 게 오늘따라 어리석게 느껴진다.



약속은 미뤄졌다. 처음에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늦게 일어났다고 11시까지 가겠다고 카카오톡을 보냈다. 그 뒤로 다른 분의 사정으로 약속은 변경되어 12시에 만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도미노 같다.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게 된 것에 이어 약속이 미루어진 것. 그것은 행운이 아닐까. 사실 나는 약속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오전에 여유를 갖고 싶었다. 평소 같으면 오전에 모임을 참여하고도 2시간 정도는 충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10시 약속으로 인해 여유라는 건 사라졌으니 조금 아쉬웠다. 게다가 난 집순이 아니던가. 그러다 보니 약속이 미뤄진 것이 행운 같았다.

우연한 사건에서 일어나는 도미노 같은 행운을 나는 좋아한다. ㅎ군과 수업을 하면서 나는 그런 행운을 맛본 적이 많다. 오늘은 수업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되뇌일 때쯤, 그래서 출발을 미루고 뭉그적거릴 때쯤 ㅎ군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수업을 못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럴 때면 나는 "야호!"를 외치며 좋아하곤 했는데, 그 타이밍이란 것이, ㅎ군과 내가 참 잘 맞았다. 내가 힘든 날 ㅎ군도 힘들었고 ㅎ군이 바쁜 날 나도 바빴다. 그래서 ㅎ군이 수업을 취소했을 때 기분 나빠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ㅎ군과 이다지도 호흡이 잘 맞았으니 10년이나 수업을 했겠지.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서는 모든 게 수월했다. 처음 가는 장소를 찾아가는 게 매번 힘든 게 길치의 삶이다. 저번 달에 새로 시작한 수업 때문에 A라는 지역을 가는데, 그곳은 아직까지도 매번 낯설고 무섭다. 버스를 타는 걸 몰라서도 아닌 데도 그렇다. 그에 반해 오늘 간 곳은 처음 가면서도 헤매지 않고 차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낯설지도 않았다. 이런 곳이야 많지 하며 걸었으니 말이다. 약속 장소에 가는 길이 간단하게 느껴졌고, 우리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가깝다고 느껴졌다.

약속 장소는 A 선생님의 작업실이다. 작업실은 옥탑방이었는데, 옥탑방에서 내려다보면 고등학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학교 근처가 좋다. 우리 집이 초등학교 앞이라 그런지 학교 근처는 언제나 따뜻하다고 느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내 삶에 리듬을 만든다. 봄이 되면 봄답게, 여름이 되면 여름답게 흘러가는 곳이 학교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강한 색채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오늘도 학원에서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들으며, 공간에는 아이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두 세명이 하하호호 떠드는 소리는 어른 열 명이 내뿜는 에너지와 맞먹는다. 어른 한두 명이 공간에서 사라지면 공간이 변했다는 걸 인지할 수 없는데, 아이들 한두 명이 사라지면 그 공간은 죽은 공간이 된다. 그만둔 학원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의 에너지가 사라지는 순간, 나는 그 학원을 나왔다. 죽은 공간이 너무도 슬퍼서, 우울해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있어야 제대로 사는 것 같다.



옥탑방에서 A와 B 선생님을 만나고 나는 나를 예쁘게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며칠 전에 본 <히든싱어>에서 가수 이소라 씨께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며 집 밖으로 자주 나와야겠다고 하셨다. 그때는 이소라 씨께서 왜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모르셨을까 아쉬웠는데 나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더라. 작년에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집순이인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괜찮았다. 그런데 그게 올해까지 이어지니 이제는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나는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간다고 착각했고 타인에게 나란 존재는 보잘것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란 존재는 미약하며 세상은 거대한 무언가여서 나를 언제든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갇혀 내 생각에 갇혀 다른 것은 보지 못했다. 새로운 바람은 내 안에 불어들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선생님들을 만나 환대를 받았고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미래를 그렸다. 내 안에 상쾌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동화 작가를 해 보는 게 어떠하냐, 글을 꾸준히 써 봐라, 글이 참 솔직하다 등 좋은 말들이 내 안으로 솔솔 불어왔다.



보고 보고 또 보는 건 시험 기간에 필요한 기술만은 아니다. 모든 게 그렇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은 보고 보고 또 봐야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는다. 좋은 말은 듣고 듣고 또 들어야 희망을 품고 새로운 미래를 그릴 수 있다. 불이 꺼져 어두워지면 다시 불을 켜면 되듯이 오늘 나는 다시 불을 켰다. 조만간 또 꺼지겠지만... 난 다시 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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