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olpit May 03. 2021

찬실이는 복도 많지

나는 찬실이 편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영화를 아침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봤다. 영화보다 책을 좋아하지만, 그런 나도 같은 책을 두 번 읽기가 쉽지 않다. 좋아하는 책이라 해도 며칠 간격을 두고 읽는다. 두 번 봤을 때가 한 번 볼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이번엔 영화를 두 번 봤다. 두 번 보고 나서야 궁금해졌다. 왜 찬실이는 복이 많은 걸까. 좋아하는 일도 못 하게 되었고, 외롭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찬실이인데, 왜 제목을 복이 많다고 했을까. 


(영화 전체 줄거리 담겨 있습니다.)



찬실이는 영화 PD다. 감독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영화가 무산되었고, 영화와 관련된 일도 뚝 끊겼다. 일단 돈을 벌기 위해 소피라는 여자 배우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게 되는데 이사 간 집의 주인집 할머니가 묻는다. ‘무슨 일을 했어?’ ‘PD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냐고.’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때 찬실이는 알게 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일이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슨 일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일을 알아야 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건 찬실이의 내면이자 찬실이가 보는 귀신 장국영이다. 처음에 귀신 장국영이 나왔을 때, 귀신인지 사람인지 분간을 못했다. 다른 영화 속 귀신들처럼 벽을 통과하지 않고 문을 손으로 열고 나온다. 추운 날씨에 러닝 바람으로 뛰어다니면서 벌벌 떨기도 하는 장국영을 귀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런 귀신이 현실성 있다. 귀신을 본 경험은 없지만 꿈을 꿀 때도 그곳이 비현실적인 공간이면서도 인물들이 혹은 상황들이 현실적으로 움직이지 않던가. 그러니 장국영 귀신도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고 나가는 게 당연하며, 추위에 벌벌 떠는 것도, 찬실이가 장국영을 찰싹 소리 나게 때리는 것도 가능할 테다. 장국영은 찬실이에게 말한다.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죠.” 영화를 좋아한다고 여겼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찬실이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변화의 시작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던 찬실이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사랑이다. 단편영화 감독이자 소피의 프랑스어 선생님 김영에게 찬실은 호감을 느낀다. 찬실이 산책을 하다가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김영에게 말한다.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 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고선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어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어떻게 그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고 지금 서 있을까. 버스 안에서 사람들을 보며, 길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찬실이도 그게 궁금하다. 인생이 궁금하고 삶이 궁금한 것이다. 그때 사랑은 무엇일까. 찬실이가 김영과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찬실이는 인생은 사랑이자 환희일 거라고 믿으며 인생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시야를 닫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사랑으로 도피해 버리는 거다. 그래서 찬실이의 사랑은 어긋난다.



좋아했던 영화 일도 무산되고, 좋아했던 사람과도 이루어지지 않는 와중에 찬실이 곁에 있는 사람은 주인집 할머니다. 주인집 할머니께서는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한글 교실에 다니시는데, 한글 교실에서 내 준 시 짓기 숙제를 찬실에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찬실은 할머니에게 일단 시를 써 보라고 하는데, 할머니가 쓴 시의 구절은 이렇다. ‘사람도 꽃처럼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할머니는 자기가 쓴 시를 읽는 와중에 눈이 붉어진다. 할머니가 이 구절을 그냥 써 내려간 것은 아닌 듯하다. 얼어 죽을 것 같던 화분을 거실로 들여왔더니, 꽃이 다시 살았다. 그런데 딸은 죽어 돌아오지 않는다. 할머니는 그런 마음을 담아 시를 쓴 게 아닐까. 찬실은 이 구절을 보자 엉엉 소리 내 운다. 찬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돌아오지 않은 열정, 돌아오지 않은 사랑에 대한 슬픔일까. 울어야 하나의 막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걸까. 열정을 담아 일을 했던 학원이 다른 학원과 합병된 적이 있었다. 원장님은 일을 그만두었고, 나 역시도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열심히 일을 했고, 아낌없이 일을 했기에,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삶이 한 번 무너졌고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키려고 애를 쓰며 근무하던 중이었다. 무너졌을 때 소리 죽여 울던 울음이 이번에는 몸 밖으로 튀어나와 하나의 거대한 울음을 만들었다. 그때 나에게 학원은 일이 아닌 삶의 버팀목이자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같았다. 상처 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 그런데 그것이 끝이 나자 눈물이 그렇게 흘렀다. 단순히 학원을 그만둔다는 것의 슬픔은 아니었다. 인생에 대한 슬픔이었다. 산에 올라가 펑펑 울고 나자 찬실이처럼 나도 그간의 물건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곳을 향해 한 발작 나아갔다. 찬실이도 그렇지 않았을까.



찬실이는 장국영과 이별하면서 마지막으로 말한다. ‘사랑은 몰라서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 믿었어요.’ 그런데 그에 대한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이에 찬실은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라고 매듭짓는다. 우리는 누구나 다 행복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매양 발견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시켜 줄 물 한 컵이다. 행복은 찾아 나서는 게 아니다. 삶 안에 행복이 있으니 삶을 넓게 바라보며 살아가면 된다. 영화를 그만두고 살 수 있냐고 김영에게 묻던 찬실은 영화만을 행복의 근원이라 믿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찬실은 삶이 궁금해졌고 그 궁금함 속에 영화도 들어 있다고 장국영에게 말한다. 산에 올라가 펑펑 울고 난 후 나도 알았다. 내가 일만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걸. 일에서 나의 성취감과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일 이외에서도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찾을 길은 많았고, 생활 전반에 행복은 숨어 있었다. 그 안에 일이 존재하는 거였다.



영화를 다 본 지금, 찬실이가 복이 많은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이렇게 생각한다. 찬실이에게 복이 많다면, 나도 복이 많은 것 아닐까.




(대사 하나하나가 전부 좋았고, 찬실이의 변화가 좋았다. 덧붙여 몇몇 장면을 이야기해 보자면 찬실이가 쓰는 시나리오를 보고 소피가 지루하다고 말하는데 시나리오를 자세히 보면 통역관이 사투리로 통역하는 대목이다. 재밌기만 하던데. 게다가 찬실이가 싸 간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김영은 찬실이의 호감을 눈치 채지 못했나. 관심 없었으면 도시락은 먹으면 안 되지~ 모든 게 다 찬실이 편에서 바라보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사람들이 하는 말은 내가 한 말에서 시작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