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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un 24. 2021

오늘부터 300일 _ 02

혼자여서 좋았어, 그 날은


눈이 온 겨울에 대해 물었지?



글쎄, 딱히 기억나는 날은 없어. 눈이 온 날, 특별하게 보낸 날도 없고 그저 평범했던 것 같아. 그 평범함에서 고르자면 올해 겨울이라고 해야 할까 눈이 푹푹 쌓이던 날이 기억나. 최근이라 기억이 잘 나기도 하는 것 같아.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사람들 사이에 어색한 공기만 감돌던 때였어. 지금과는 다른 것 같아. 지금은 '그러려니' 하며 마스크를 낀 상태로 행동한다면 그때까지만 해도 '불편하다', '힘들다', '지친다'라는 느낌이 가득했거든. 서로 친밀감이 없어졌다고나 할까. 그래 보였어, 그때.



그런데 눈이 엄청 쏟아진 거야.



나는 신도림에서 퇴근하는 길이었어. 지하철까지는 평소와 같이 탔는데 문제는 버스였어. 버스 정류장에 서니, 버스가 안 오더라고. 한참을 기다렸지. 그러니 어땠겠어. 사람이 가득 찼겠지? 사람들 사이에 끼고 껴서 겨우 버스에 탔어. 그러면 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버스 기사 아저씨도 눈이 이렇게 온 게 당황스러우신지 버스가 오다가 눈을 맞았다며, 빨리 올 수가 없었다고 말하더라고. 혼잣말은 대개 평소 상황과 같지 않아서 하기도 하잖아. 아저씨는 계속 말했지. 바퀴가 눈에 빠지기도 하고, 다른 차들도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간다고, 갑자기 이렇게 눈이 오니 곤란해 죽겠다고 말이야.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떠나는 것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어. 사이에 끼는 자동차들과 사람들을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삼십 분은 훌쩍 지나더라. 사람들만 가득 태웠지 가지 못하는 버스였어. 아무튼 그렇게 한참 있다가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덕에 난 눈이 온 거리를 보게 되었어. 진짜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갔고, 더러 바퀴가 굴러가지 않아 애를 먹는 사람들도 있었어. 차에서 내려 두 명이 혹은 세 명이 자동차를 뒤에서 밀기도 하더라고. 나는 보통 눈이 아니다 하며 혀를 둘렀지. 그리곤 버스에 타서 다행이다 싶었어.



동네에 와서 기사 아저씨는 사람들을 내려주면서 조심하시라고 일일이 말을 건넸어. 그런 말이 친절하게 느껴졌어. 눈이 안 왔다면 듣지 못할 말이었으니까. 사람들은 기사 아저씨의 말처럼 조심히, 천천히 내렸어. 나도 내렸지.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어. 가족들이 마중 나온 사람들도 있더라고. 나는 집에 가려고 길을 건넜지. 그때 자동차 하나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퀴만 헛돌기 시작하는 거야. 운전자가 도와달라고 했는지 기억나진 않아. 다만 주변 가게 아저씨, 아줌마들이 그 자동차를 에워싸면서 차를 밀어주기 시작했다는 게 기억나. 따뜻하지 않아? 2021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어. 꼭 1980년대 같다고나 할까. 예전엔 이렇게 서로 도우며 허허허 웃으며 큰일이네 한숨 쉬며 살았을 것 같은데 언제 우리는 이렇게 딱딱하게 지내게 된 걸까. 1980년대도 잘 모르면서 그때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집에 가는 길. 한 십 분을 걸어야 했나. 혼자였어. 눈길을 걸으며 발이 푹푹 빠지는 게 신기해서 사진도 찍었지. 나름 눈을 즐기고 있었어. 이런 순간은 다신 오지 않을 것 같았거든. 눈길에선 원래 걸음이 느려져. 겁이 많은 탓이야. 천천히 걸으며, 이번에는 눈에 발자국도 남겨 보고 소리도 들어 보며 걸었어. 가로등의 불빛이 눈에 비치고, 난 그런 눈을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그러다 보니 언제 집에 도착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왔어. 온전히 혼자였지. 집에 다다라서 아쉽단 생각이 들었어. 춥기도 추웠지만 눈을 더 즐기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눈으로 인해 소란해진 거리의 상황도 즐기고 싶었달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혼자 눈을 바라본 게 좋았던 것 같아. 누군가와 함께 있었으면 어땠을까. 눈이 와서 좋다느니, 눈이 이렇게나 많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겠지. 그런데 혼자였기에 난 조용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겼어. 고요히. 외롭지 않았고, 고독하지 않았어. 흥분하지도 않았고, 신나지도 않았어. 미소가 조금 생기는 그런 혼자만의 시간이었지. 이럴 때 혼자인 게 좋았던 거구나,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드네.



올해 겨울을, 좋았던 순간이라고 기억해도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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