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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un 27. 2021

오늘부터 300일_03

날 위로해준 고양이


고양이를 보면 날 위로해 주던 날이 떠오른다. 난 동물에 관심이 없다. 고양이 말고도 다른 동물이 무엇이 있는지 모를뿐더러 흥미롭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고양이 이후로는 좀 달라졌다. 동물이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 싶어졌고 동물의 하는 행동이 사람이 하는 행동인 양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날 위로해 주던 때는 내가 울며 산으로, 절로 가던 날이었다.



신림에 위치한 학원에서 일할 때였다. 난 열심히 일했다. 돈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열정만으로 일했다고나 할까. 어떤 선생님이 나에게 와서 얼마 받고 일하냐고 물었을 때도 얼마 받지 못해서 기분이 상했지만 금세 잊고 다시 열심히 일했다. 미래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한 건 아니다. 아, 전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 적은 있다. 잘나가는 사람처럼 스카우트 제의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렇지만 그건 꼭 이뤄지지 않아도 좋았다. 두 군데의 학원을 다니며 과외까지 하던 때여서 일이 넘쳐 났으니까. 학원에서 국어도 가르치고, 논술도 가르치고, 인적성도 가르쳤다. 과외 두세 개를 뛰었고 다른 학원에서도 고등부를 가르쳤다. 넘쳤다, 넘쳤어. 그러니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을, 나의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 무렵 난 힘든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버스 맨 앞자리에서 매일 울었다. 집에 가는 길에 울었고 출근하면서 울었다. 도착해 씻으면서 울음소리가 물소리가 묻히도록 신경 쓰며 울었고 베개가 축축해지도록 울었다. 자책감을 어찌할 줄 몰랐고,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나를 휩쌌다. 좌절을 하고 무너지면서 일상을 유지해 나갔다. 그때 유일하게 웃던 시간이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학원이 더없이 좋았다. 그 공간에서 일하는 게 좋았다.



그러길 몇 개월... 학원이 합병된다는 소식이 있으면서 나는 잘렸다. 원장님이 학원을 파신단다. 그래서 부원장님도 학원을 그만두고 나오는 거고, 나 역시도 나와야 한다고.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원장님이 다른 학원을 사는 줄 알았고, 어쩌면 내가 전임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장님은 처음부터 학원을 팔 생각은 없으셨다. 합병이 우연히 진행되었고 그러다가 팔기로 결심한 거다. 그러니 내가 상상한 게 얼토당토하지 않은 건 아닌데... 아무튼 나에겐 깜짝 놀랄 소식이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야 별게 없었다. 그전부터 두 학원이 합병되면서 새로운 선생님들로 학원은 복잡해졌고 내 자리가 없어진 탓에 짐을 간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시험 기간이라서 일찍 집에 왔는데, 집에 오자마자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친구에게 말해서 친구와 약속이 생겼다. 그 사이 한 시간이 비어 나는 산으로, 절로 향하게 된 거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단순히 학원에서 나와야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티고 버텨서 이제 즐거움 하나를 찾았는데 그것마저 무너져 내린 이 상황에 눈물이 났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싶은 마음이랄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니었는데 그땐 갑자기 닥친 상황에 눈물이 났다.



약속이 있기 전, 위쪽과 아래쪽 방향의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아래로 가면 사람들이 가득한 사거리가 나오고 위쪽으로 가면 아파트 단지와 산이 나와서 조용했다. 단지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느라 위쪽으로 향한 것이었는데 어느덧 나는 절로 향하고 있었다. 울면서 언덕을 올라갔다. 그래서 언덕이 가파른지 몰랐고 날이 어두워오는지 몰랐다. 절에 도착하고 동네를 내려다보자 '끝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음이 끝났다.", " 마음이 진정되었다."라는 생각. 이제 절에서 내려오려고 보니 날이 꽤 어두워졌다. 어찌 내려가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때 고양이가 날 뒤돌아보았다.



절에서 키우는 고양이인지, 산에서 사는 고양이인지 알 수 없었다. 고양이는 빤히 날 쳐다보더니 계단을 두어 개쯤 먼저 내려갔다. 고양이가 무서워 고양이가 움직이는 걸 보고 뒤따라 내가 움직이다 보니, 고양이가 내려간 계단 두어 개쯤 나도 내려갔다. 그때 고양이가 뒤돌아보았다. 더 내려가지 않고 두 계단쯤 내려가놓고 날 쳐다봤다. 놀란 내가 계단에 멈춰 서자 그제야 다시 두어 계단쯤 내려갔고, 또 날 쳐다보았다.



안내해 주는 것 같았다. "혼자 가려니 무섭지? 내가 안내해 줄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양이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날 안내해 줬다. 고양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고, 언덕을 내려가자 무서움보다는 신기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난 소리 내어 말했다. "고마워. 이제 안 데려다줘도 돼. 어서 가서 쉬렴. 고마워, 진짜." 그리고 고양이는 더 내려오지 않았다. 혼자 가는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가 이 산의 주인인 것처럼. 손님을 배웅하는 것처럼.



그 뒤로 나에게 고양이는 위로다. 위로라는 단어가 몸에 서서히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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