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미래, 나

9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며

by 엄달님

2025.11.13.목 9:20


11월 둘째주 목요일. 수능날이 둘째주 목요일이었지, 참.


9:59

밥 먹고 와서 다시 쓴다. 9년 전의 나는 몰랐다. 내가 수능날 아침 한가로이 모닝페이지를 쓰는 어른이 되어 있으리라곤. 그보다 더 어렸을 땐 내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써 큰 역량을 펼치는 큰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고, 열아홉 즘에는 많이 헷갈렸던 것 같다. 그때는 오히려 '일단 괜찮은 대학이라도 가자'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1년동안 열심히 했으니 그동안 본 모의고사보다 성적이 잘 나와서 상향 지원한 대학에 분명히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나마 희미한 근거라면 내가 열심히 했다라는 자신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었을텐데)


물론 모든 평가원 시험 중 수능을 가장 잘 본 것은 맞으나, 내가 원하던 성적이 아니었다. 왜 그것보다도 시험을 더 잘 볼것이라 믿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금 같은 고등학교 1,2학년의 시간을 연애로 허비(?) 한 것 치고는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내 운인지 모르겠다. 수능날의 기억이 스친다. 아쉬운 점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 반찬이 기억이 안 난다. 점심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알 길이 없이 긴장했었다. 9년 전만 해도 수능 날 겨울날 같은 추위 속에 시험을 치러야 했다. 아현동의 중앙여고. 너무 편안하면 잠이 온다고 입던 대로 입겠다며 입은 교복. 교문 앞까지 날 데려다준 엄마아빠.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인사하던 순간. 배치된 자리가 맨 왼쪽 열 맨 앞 자리여서 절망했던 기억. 1번부터 답안이 4444544 였던 1교시 국어시험. (체크한 답안을 믿을 수가 없어 1번부터 화작문을 여러번 다시 풀다가 마지막 지문을 통째로 찍었다) 꽤나 논리적으로 찍었던 수학 30번 문제 (심지어 맞췄다) 어두워진 교문 밖을 나서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언니. 울며 논술학원에 전화를 걸어 신청한 특강. 택시 안에서 함께 맞춰본 답안. 빕스에서 먹은 저녁. 대학에 못 갈 것 같다며 울었는데, 그닥 기대하고 있지 않는다는 엄마아빠의 느긋한 태도. (웃기다)


어른들은 수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맞는 말이오나, 틀린 말이기도 하다. 당시 열아홉의 나에겐, 수능날에, 이것은 전부였다. 특히 과도한 긴장감에 떨어진 컨디션으로 첫 수능을 망쳤던 우리 언니에게 수능이란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었을까. 오늘 많은 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중 하나를 지나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뭉클하다. 아마 누군가에겐 인생 처음 겪는 떨림과 긴장일 테고 누군가에겐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일 테고 또 누군가에겐 설레는 날이겠지.


아침을 먹으며 부모님께 지금의 나에게 실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빠는 대답했다. '네가 무대에서 열심히 공연하는 것을 보면 하나도 실망스럽지 않아.' 나는 어렸을 적 동네 아주머니들이 자식들 학원을 다 날 따라서 보내던 동네에서 알아주는 똑똑이었다. 아빠는 특출난 나를 보며 그때 드디어 우리 엄씨 집안에 인물이 하나 났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나는 지금 아홉시가 넘어 일어나는 영원한 구직자 딸이 되었다. 물론 게으르게 굴 때는 나에게 실망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부모님의 기대감 역치가 많이 낮아진 것 같다. 예전엔 엄마도 나에게 동시통역사가 될래? 판사가 될래? PD가 될래? 하곤 했으니까. (난 꿈이 여러번 바뀌었었다)


난 지금 이대로의 삶이 좋다가도 열아홉의 나를 상상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난 여전히 꿈이 크다. 배우로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도전해보고 싶은 여러 분야가 있다. 루틴을 세웠다가 실패하고, 목표를 적었다가 이루지 못 하고, 계획을 썼다가 지우는 요즘이 수능날이 되니 부끄러워진다. 약 50만명의 수험생이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을까. 나는 그런 목표를 세우고 노력을 했는가? 아니라고 답해야겠다.


과거의 영광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너는 공부로 큰 성공을 이룰 것 같다고 수학학원 선생님이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한참 그른 일이다. 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어른 부류 중 하나인 '과거 영광 파먹는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고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옛날에 어땠는데, 로만 침을 튀기며 사는 못난 어른이 될 게 뻔하니까. 괜히 나에겐 똑같은 날이지만 수능날이라니 떨리기도 하면서 예전의 내가 그랬듯 진로 고민을 하게 된다. 일단 오늘은 보완 요청이 온 예술인 증명을 마치고, 블로그 협찬 글을 올리고, 오디션 지원 공고를 검토하고, 경제 책을 읽어야 겠다. 하나하나씩. 천천히.


10년 후엔 내가 나를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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