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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플 Jan 10. 2021

만년필-필기구들

생활 속의 사물 #1



손글씨를 쓰는 일이 드물어져서 오랜만에 펜을 잡으면 어색하기도 하고, 글씨도 예쁘게 써지지 않는다. 


학교 가기 전에 이미 한글 정도는 다 쓰고 읽을 줄 아는 요즘의 어린이들과 달리 학교 가서 한글을 배우던 세대이기 때문에 글자 쓰기를 배운 것은 학교에 입학한 다음이었다. 당연히 처음 사용한 필기구는 연필이었다. 잘 깎아서 뽀죽 하게 다듬어진 연필로 사각사각 쓰는 촉감을 사랑한다.  연필 깎는 걸  좋아해서 요즘도 아주 가끔 연필과 색연필을 모두 꺼내서 새로 깎고 촉을 다듬어 본다. 그것들은 내 연필통 안에서 오랫동안 그대로 꽂혀 있고 잘 쓰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는 실용적인 이유로 연필보다는 샤프펜슬을 많이 사용했다. 


아버지가 팔 절지 갱지에 칸을 나누어 긋고 한 칸에 한자씩 원고지에 글 쓰듯 글자 연습을 하게 하신 일이 생각이 난다. 하루에 한 장씩 쓰고 저녁에 아버지께 검사를 받아야 했다. 글자를 크고 똑 바르게 써야 해서 갱지 한 장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아서 하기 싫어했고 아버지가 늦게 오시면 검사를 안 받아도 되었기 좋아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악필은 면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 알파벳을 처음 배울 때 필기체를 펜으로 쓰는 연결 해서 쓰는 것이 멋있어 보여서 펜을 쓰기 시작했다. 펜촉을 잉크에 찍어가며 쓰는 게 좋았다. 처음에는 펜촉을 볼펜 뒤에 끼워 쓰다가 대장군에 조각된 나무 펜대를 하나 갖게 되면서 오랫동안 그 펜대를 썼다.  펜으로 쓰는 것은 연필과 달라서 잘못 쓰면 지울 수가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잘 써야 했지만, 잉크 방울이 종이에 뚝 하고 떨어질 때도 있고 잉크를 너무 많이 찍으면 잉크가 처음에 후루룩 하고 흘러 뭉툭한 글자를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 펜대도 여전히 내 연필통에 꽂혀 있다. 

펜촉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잉크가 필요해서 집에서 밖에 쓸 수 없어서 만년필이 갖고 싶었다. 처음 가져본 만년필은 파이롯트 만년필로 펜촉의 두께가 파인 Fine이어서 글을 쓰면 글자가 가냘파 보였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내 손에 들어온 만년필이 파카였는지 몽블랑이었는지 브랜드는 확실치 않지만, 누가 쓰던 걸 얻게 되었는데 펜촉이 미디엄 Medium이었다. 이 두 자루의 만년필을 십 년 넘게 사용했는데, 둘 다 잃어버렸다.    


처음 일기는 연필로 쓰기 시작해서 펜촉으로 한동안 쓰다가 그다음에는 만년필로만 일기를 썼다. 볼펜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들춰보면 일기는 대부분 만년필로 썼다. 촉 끝에서 흘러나오는 잉크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실처럼 끌어내 주는 것 같다.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글씨는 점점 휘갈겨지게 되고 글씨체는 점점 행서체에서 초서체로 변해가서 내가 쓴 글자들을 나도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그 글들이 컴퓨터에 찍힌 네모 반듯한 글자들보다는 좀 더 나다운 것 같다. 


고민 많던 시절에는 일기장의 두께도 고민만큼 두꺼워지다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일상이 단조로워지면서 일기 쓰는 일도 줄어들었다. 만년필과 헤어지고-한 자루는 잃어버렸고, 한 자루는 잉크가 떨어진 후 쓰지 않게 되었다가 사라져 버렸다-, 사용하고 휴대하기 편한 볼펜을 사용하게 되고, 손글씨를 쓸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어쩌다 한 번씩 쓰고 늘 쓰지도 않지만 볼펜은 굳이 사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그냥 생기다 보니 다 쓰고 버려지는 것보다 생기는 것이 더 많아서 연필통 가득 볼펜이 있다. 


연필통 한 가득 볼펜이 있지만, 볼펜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만년필을 갖게 되었다. 만년필 가게 진열대에서 비싼 만년필을 보면 혹하긴 하지만,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과 필요의 적절한 타협점에서 레미 만년필을 사용한다. 짙은 그레이 바디에 펜촉 두께가 미디엄인 것과 안이 보이는 투명한 바디에 펜촉 두께가 파인인 두 자루를 갖고 있다. 

요즘 글을 쓸 때는 컴퓨터를 사용한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좋은 점이 많다. 빨리 칠 수 있고, 악필로 알아보지 못하는 글자도 없고, 오타도 쉽게 수정할 수 있고, 퇴고도 편하다. 밖에서 급하게 메모를 남기거나 짧은 글을 써야 할 때는 셀폰을 이용하기도 한다. 


여전히 손글씨로 쓰는 것은 일기다. 쓸게 없을 것 같을 때도 노트를 열고 만년필을 잡고 쓰기 시작하면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내 속에서 흘러나온다.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을 일기를 쓰면서 나에게 일어난 일들, 내가 했던 말들, 행동들을 돌아보며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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