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다이어리 2017 #12
12월 22일
사흘을 묵었던 바릴로체를 떠나 다시 국경을 넘어 칠레로 간다. 어제 예약해 둔 오스르노 Osorno 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아침을 건너뛰고 체크아웃을 하고 나와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에 올랐다.
아르헨티나 국경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출국 도장을 받고 버스를 탔는데 이번에도 국경은 바로 나오지 않고 버스는 산길을 끝도 없이 달렸다. 도대체 여기는 아르헨티나인 건지 칠레인 건지 알 수도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심장이 쫄깃해질 즈음 버스는 칠레 입국 심사를 하는 건물 앞에 정차했다. 버스에서 기다리다가 내려서 짐 검사받고 입국 도장을 받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발디비아 Valdivia
1시 반이 넘어서 오스르노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바로 1시 50분 떠나는 발디비아 Valdivia 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3시 40분에 발디비아에 도착했다. 내일 푸콘 Pucan 행 버스표를 예약해야 하는데 버스터미널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고 터미널을 떠나 숙소로 향했다. 조그만 마을이라 숙소까지 일 킬로미터 정도여서 걷기로 했다. 길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돌이 깔린 길이라서 캐리어가 잘 구르지 않았다. 게다가 덜거덕거려서 살펴보니 가방의 바퀴 하나가 망가져 있었다. 턱도 많고 가방도 고장 나고 가는 길이 힘들었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일하는 아가씨는 영어를 못 알아듣고 나는 스페인어를 몰라서 구글 번역기까지 돌려가며 이야기를 한 끝에 주인 오면 돈을 주기로 하고 우선은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계속 호스텔에 묵다가 오랜만에 혼자 방을 쓰게 되었다. 건물은 조그마했지만 방이랑 식당은 아담하고 정갈해서 마음에 들었다.
좀 쉬었다가 밖으로 나가 강변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서 버스터미널에서 내일 저녁에 푸콘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사고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시내 중심가의 한 아담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가이드북에 소개된 식당이었는데 루이지애나 스타일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루이지애나라면 미국 남부에 있고 프랑스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니 미국화된 프랑스풍이라고 해야 될까? 칠레에서 루이지애나 스타일이라나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음식은 괜찮았다. 저녁을 먹고 시내를 좀 돌아다니다 돌아왔다.
밤에 주인이 와서 방값을 미화로 지불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칠레 페소로 표시된 방값을 미화 환율로 계산해서 부르는 가격이 좀 높은 듯했지만 따지지는 않았다. 가지고 있는 칠레 페소가 많이 없기도 해서 미화로 지불했다. 가지고 있는 미화를 칠레 페소로 바꾸려면 어차피 수수료가 들기 때문이다. 칠레 페소와 아르헨 페소를 바꾸어 오긴 했지만, 여행을 갈 때는 미화가 현지 화폐로 바꾸기 제일 편리하기 때문에 비상용으로 미화를 가지고 있다가 쓰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캐나다 달러를 미화로 바꾸고 다시 현지 화폐로 바꾸는 과정에서 환율과 수수료 때문에 비용이 추가된다.
12월 23일
아침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다리를 건너가서 좀 더 걷다가 돌아왔다. 어제 지나쳤던 강가의 빈 천막에 사람들이 바쁘게 막 잡아온 생선, 과일, 치즈나 말린 생선 같은 것들을 팔기 위해 정리하고 있었다. 시장인 모양이었다. 시장은 하루를 시작하는 분주함과 활기도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장사를 시작한 것 같지는 않아서 나중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 식당에 갔는데 식당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 식당을 차지하고 앉아 아침을 먹었다. 방으로 올라가서 조금 뒹굴거리다가 체크아웃을 하고 가방은 맡겨놓고 다시 나왔다. 저녁 버스 시간까지 이곳을 돌아볼 예정이었다.
니에블라 해변 Niebla beach
강가를 다시 따라 내려가 여행 안내소에서 강을 도는 투어에 대해서 물어보니, 투어는 1시간, 3시간, 6시간 이렇게 세 종류가 있는데 3시간짜리와 6시간짜리는 푸콘 행 버스 시간 전에 돌아올 수가 없고 1시간짜리는 요 주변만 돌고 바다까지는 안 가는 것 같아서 안 타기로 했다. 대신 버스를 타고 발디바아 강과 태평양이 만나는 곳에 있는 니에블라 Niebla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니에블라 ‘niebla’는 스페인어로 ‘mist’ 혹은 ‘fog’로 안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강이 바다를 만나면서 안개가 많이 끼는 모양이다.
여행 안내소에서 알려준 대로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서 조금 걸어가니까 바로 해변이 나왔다. 강 하구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은 해변에서 좀 떨어져 있었다. 해변에는 수영하는 사람 몇, 자리를 깔고 앉거나 누운 사람 몇 명뿐이고 넓디넓은 해변에는 길게 밀려오는 파도들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여기는 남태평양이지만, 내 고향 부산의 바다와 지금 살고 있는 밴쿠버 바다가 모두 태평양이니 이 바닷물에 언젠가는 밴쿠버 앞바다나 부산의 앞바다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멍을 때렸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나나와 요거트를 먹고 사진도 몇 장 찍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질 때까지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한적한 마을은 구경할 것도 딱히 없어 보여서 다시 나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들어갈 때 쿤스트만 Kunstmann를 지나쳤는데 멀리서 봐도 브루어리인 것을 알 수가 있었고 브루어리 옆에 식당이 있는 것도 봐 두었기 때문에 점심을 거기서 먹을 생각으로 그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쿤스트만은 발디비아의 로컬 맥주인 것 같았다. 브루어리 투어 시간은 안 맞아서 투어는 못하고 식당에서 크라프트 맥주와 점심만 먹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발디비아에 돌아와서 시내를 잠시 배회했다. 강가의 풍경들이 너무 고즈넉하다. 별 큰 기대 없이 발디비아에 왔는데 유유히 흘러가는 발디바아 강가의 이 조그만 도시는 참 아름답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하루였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은 하루였다.
숙소에서 가방을 찾아 푸콘 행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어제는 중심가를 지나갔는데 턱도 많고 건널목도 많아서 가방을 끌고 가기에 많이 불편했는데 한참 돌아가긴 해도 강변 산책로가 가방을 끌고 걷기가 수월할 것 같아 강가를 따라 걸었다. 터미널 근처 가게에서 자두 한 봉지를 사들고 무사히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