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명자 May 08. 2021

뉴욕의 거리에서

-깊은 상처가 아문 자리 -



오월의 싱그러운 햇살이 내리쬐는 뉴욕의 거리는 이른 아침부터 활기차다. 길거리엔 사람들로 넘쳐나고 각양각색의 푸드 트럭 주위엔 패스트푸드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바람이 한들거리는 공원에도 개성 넘치는 사람들의 패션으로 괜스레 흥이 난다.    


한인 타운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러 가는 길이었다. 두 다리가 잘린 여인이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건물의 모퉁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성긴 바느질 자국처럼, 잘려나간 두 다리의 환부가 눈부신 햇살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를 빠르게 걸으며 나는 마치 몰래 숨겨놓은 비밀이라도 들켜버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이내 묘하고 생경한 느낌이 나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환부에서 느껴지는 저 지독한 아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곳 미국에선 타인의 삶 따위는 안중에도 없겠지만 나는 자꾸만 그녀의 잘려나간 다리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살아있는 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거리를 떠돌고 구걸을 하고 노숙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삶에도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도하며 복잡한 거리를 빠져나왔다.    


삶을 살다보면 죽을 만큼 힘든 일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평생을 살면서 그러한 고통의 순간을 겪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겠지만 불행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어쩔 수가 없다. 그 불행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돋아날 때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불러내는가 보다. 초임교사 발령을 받고 이듬해, 나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평생 고생만 하며 사시다가 한 순간 사고로 삶을 마무리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마치 현충일이 돌아오듯 나의 아픈 상처가 도져서 우울해지곤 했었다. 아버지는 맏딸이라고 끔찍하게도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는데 변변한 효도 한 번 할 시간도 주지 않으시고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셨다.    


다리를 잃은 거리의 젊은 여인처럼 나도 한때 아버지를 여의고, 지붕 없는 집에서 누워있는 것처럼 허망함을 느끼며 산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어머니와 백내장으로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홀로 집에 계신 할아버지를 간호해야 했던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무면허인 가해자와의 합의문제는 나를 더욱 두려움과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했었다. 그 때의 고통은 신체화로 나타났는데 갑자기 살이 심하게 빠지고 잇몸까지 내려앉았다.    


과거란 무엇인가? 우리는 과거의 창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간다. 어릴 때 큰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유독 아픔에 민감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에겐 아픔과 고통 경험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 애도하고 용서하고 치유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아픔을 햇볕 아래로 끄집어내서 희망과 환희의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 나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문득문득 어떤 지점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듯 극심한 아픔과 마주하게 된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마르지 않는 슬픔의 우물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만 같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깊은 애도의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 당시 불행했던 현실을 덮어둔 채, 아픈 엄마를 두고 멀리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일상으로 서둘러 돌아가야 했고, 그 슬픔을 그저 덮어두고 많은 세월을 보내왔다.     

그래서인지 아프고 고통스런 이들을 보면 자석에 끌리듯 끌린다. 상처가 상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아픈 과거를 가슴 속에 박제된 인형으로 세워둔 채, 두려움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어디서 올라오는지 조차 모르고 일상을 살아간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자신의 뒤에 꽁꽁 숨어서 칭얼거리는 줄도 모르고.    


상처를 끄집어내어 햇볕에 말리듯, 상처를 애도하고 치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숨겨둔 상처는 오랜 상처로 남지만, 꺼내놓은 상처는 이미 상처가 아니라 새살이 된다. 아픔과 고통은 이해와 용서로 희망과 기쁨의 에너지로 전환된다.     


두 다리가 잘린 환부를 아무렇지 않게 내 놓는 저 여인은, 상처 많은 내게는 연민의 대상인지 모르지만, 지나간 아픔을 잊고 세상을 초탈한 자유로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아문 자리 위에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과 달콤한 꽃향기가 그녀를 행복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상처에도 언젠가 꾸덕꾸덕 딱지가 아물고 단단한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그리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살아날 날이 찾아올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붓으로 자유를 찾은 모드 루이스(Maud Lewi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