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명자 May 05. 2021

자꾸만 등이 아프다

- 아픈 기억이 자꾸 나를 찌른다(그림은 엄명자의 '어머니의 방')


11월 말부터 시간이 나의 숨통을 조여 왔다. 집안 창호공사에 김장, 학교 행사, 결혼식, 송년 행사가 빡빡한 일상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일정도 주말마다 경주, 포항, 울산 등을 들렀다가 서울을 가야하는 식이었다. 12월 중순 결혼식 주례를 기점으로 혓바늘이 돋고 면역력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도 다니고 몸에 좋다는 차도 마시고 뜨끈한 복국도 먹어 보았지만, 얼음 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붙잡고 있는 것처럼 위태위태하더니 크리스마스이브에 결국 드러눕고 말았다. 열이 오르고, 온 몸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어찌 된 일인지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관절이란 관절은 다 아프고 근육은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몇 년 동안 의식이 주도하는 대로 따라가며 꾹꾹 참아왔던 몸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화산폭발을 하는 것 같았다. 생각은 얕아지고 이 통증만 빨리 사라져 주길 바랐다.  


나는 통증을 겪으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오만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남편이 독감예방주사를 맞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들은 채도 않고, 내게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맹신했던 것이 실수였다. 크리스마스에도 온 종일 방바닥만 헤맸고, 이튿날도 출근을 할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찾아간 신장내과에서 고열과 통증의 원인이 급성신우신염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시간 병원에 누워 주사와 링거를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열이 나고 극심한 통증이 찾아올 때 엄마 생각이 났다. 가족이 모두 나가고 혼자가 되었을 때 그냥 목 놓아 울었다. 정신은 혼미한데 돌아가신 엄마가 나 같고 내가 엄마 같아서 서럽게 울었다. 그 울음은 나의 몸 깊은 곳 우물 안에 고여 있던 깊은 슬픔 같기고 하고 아니면 대대로 내려오던 설움 덩어리 같기도 했다. 할머니와 엄마처럼 힘들게 사셨던 조상들이 토해내지 못했던 피멍울 같기도 했다. 나는 앓았던 일주일 동안 여러 차례 울었다. 나의 울음은 의식의 일이 아니라 몸의 일이었다. 임신한 여성이 산달이 되어 몸을 풀듯이 내 몸 속에 각인된 슬픔과 고통을 풀어내는 일이었다. 내 몸 속에서 덜 자란 아이가 웅크리고 있다가 엄마를 찾아 꺼이꺼이 우는 울음이었다. 나의 울음 속엔 막내 동생을 임신하고도 추운 겨울 무거운 연탄을 들고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던 엄마의 고단함을 풀어드리는 살풀이가 숨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겨울 아침, 아버지는 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우셨다. "명자야, 엄마 밥 못한다.” 그 말 한마디에 ‘엄마가 몸살에 걸리셨구나! 어지럼증도 심하시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군말 없이 새벽부터 일어나 쌀을 씻어 연탄불에 밥을 안치고 반찬을 해서 동생들에게 먹이고 학교에 갔다. 어린 남동생 셋은 내가 아니면 아침밥도 굶고 마음의 허기를 달래야 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나마 고달픈 삶에서 하루 이틀만 쉬면 오뚝이처럼 일어나셨다. 이때만 해도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이라 나는 사랑받는 고명딸이었다. 장사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밥하고 반찬하고 빨래도 하고 가게일도 도왔다.   


반찬이라 해야 감자나 양파볶음, 김치나 된장찌개 이 정도였지만 나는 제법 반찬을 잘 만들었다. 동생들은 엄마가 한 반찬보다 내가 한 반찬을 더 좋아했다. 쌀가게엔 방 하나에 부엌도 하나씩 딸려 있었는데. 커다란 빨간 고무 다라이에 옷이며 이불을 넣고 발로 밟아 빨았다. 헹구면 헹굴수록 깜장색 물이 하얗게 변해가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았다. 엄마는 내게 집안일을 자주 시켰다. 나는 공부도 애살스럽게 하고 짐자전거에 쌀이나 구정물을 싣고 배달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만 해도 부모님께 나는 기대주였고 착한 딸이었다. 대구로 유학을 떠나고 직장을 구해 타지로 떠돌고 결혼을 하면서 나는 점차 불효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단정한 쪽머리를 하신 자그마한 키의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면 오래 머무르지 않으셨다. 그마저 우리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살뜰한 정을 느껴볼 새도 없었다. 시골의 군 의원쯤 되는 가문의 막내로 이란성 쌍둥이였던 엄마와 외삼촌은 외가에서 천덕꾸러기였다. 아버지는 전답 꽤나 있는 외가에 이것저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엄마의 몫으로 우리 집까지 건너올 재산은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외가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외가에 든든하게 기댈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아버지도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래저래 엄마는 부모형제 덕 없이 오로지 몸만 의지해야 하는 슬픈 신세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더 불쌍했다.  


엄마는 내가 결혼해서 둘째딸을 낳았을 때, 아이 볼 사람이 없다고 하자 하던 일을 접고 시골에서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을 해 주셨다. 그런데 둘째딸이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어머님이 키우던 큰집 조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자 어머님이 우리 딸들을 키우고 싶어 하셨다. 엄마는 쫓겨나듯이 시골로 돌아가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오랜 시간 우리 딸들을 애지중지 키워주신 엄마께 나의 편의만 생각하고 엄마를 돌려보냈다. 엄마는 내색은 않으셨지만 시린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우리 집에 와 있는 동안 자주 핀잔을 주었다. 우유병을 소독하다가 빨래를 삶다가 깜빡 잊고 시커멓게 태워먹었을 때도, 뇌에 이상신호가 오고 다리를 조금씩 절기 시작할 때도 왜 그렇게 걸음을 똑바로 못 걸으시냐며 화를 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도 기억을 못하고 까먹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병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예전에 나는 미처 몰랐다.

 

그래도 엄마가 가장 행복해 하셨을 때는 우리 딸들을 건사하고 먹이고 입히고 함께 산책을 하고 시장아줌마들과 앉아서 수다를 떨 때였다. 그때는 엄마의 삶에서 윤기가 자르르 났다. 얼굴이 꽃처럼 피었다. 쫓기듯 시골로 간 후 엄마의 삶은 퍼석해졌다. 가끔은 동네 노인들이랑 찌짐도 구워 드시고 막걸리도 한잔 씩 하며 노랫가락을 읊으셨지만 표정 속엔 무언가 외롭고 슬픈 표정이 숨어 있었다. 나는 가끔 엄마 집에 갈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그마저 자주 가지 않았다. 엄마의 집은 좁고 누추하고 찌들었고 생기가 없었다. 나는 점점 내 삶의 병풍 뒤에 엄마를 가려두고 나의 삶에만 치중했다. 대학원을 가고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우리 딸들의 입시와 남편의 승진에만 신경을 썼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점점 멀어졌다. 엄마의 정신은 조금씩 치매라는 병에 갉아 먹히고 몸은 조금씩 암이라는 병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교묘하게 엄마의 등골을 빼먹은 불효녀가 틀림이 없다.  


몸살은 지나갔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꾸만 등이 아파오고 숨이 차다. 그 동안 몸을 혹사시켜 그럴 것이다. 힘든 일을 겪으면 ‘등골이 휜다.’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등은 그만큼 우리 몸의 에너지의 주축이 되는 곳이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어쩌면 아픈 등은 의식이 아니라 몸의 기억이고 몸이 내주는 길이다. 며칠 간 나는 앓으면서 나의 몸은 엄마에 대한 회한을 함께 풀어내고 있다. 내 몸엔 엄마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 함께 앓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아픈 등을 쓰다듬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빌 듯 엄마의 등도 쓸어내릴 것이다. “엄마,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엄마.”  




삼양동 시절 내개 삼계탕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길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질 질긴 허기는 가지질 않는데  

– 박소란의 시 ‘배가 고파요’-  

매거진의 이전글 뉴욕의 거리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