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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명자 May 05. 2021

비경도 결국은 우리 안에 있다

- 그녀의  눈을 통해 보는 새로운 세상 -

     

신은 이 세상에 비경을 곳곳에 숨겨놓았다. 그 비경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를 나는 알고 있다. 접신을 하듯 어느 계절과 시간에 어디를 가야 할지 아는 이 J. 그녀를 알고 있는 우리들도 신의 가호가 넘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녀를 알기 전에는 세상 속에 숨어있는 비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일상에 갇혀 삶을 살아내기에도 벅차했다. 세상 도처에 비경이 숨어있어도 그것을 보려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것을 보려는 마음의 여유와 센스는 우리 안에 있다. 비경도 결국은 우리 안에 있다는 뜻이다.    

     

멀리 창원에서 아모르가 J의 집이 궁금하다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5월 그녀의 집은 꽃 대궐이 따로 없다. 하얀 찔레꽃이 담벼락에 걸터앉아 추파를 던지면, 자신도 모르게 오도카니 그 자리에 서서 흰 꽃의 명랑한 인사를 받지 않고는 배겨날 재간이 없다. 솟을 대문 밖에선 보랏빛 파라솔 꽃이 총총한 눈빛으로 마중을 나와 있고, ‘때롱때롱’ 풍경소리가 바람결에 그네를 타며 망을 보고 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일 년 중 이맘때 뜰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저께 내린 비로 공기도 청아하고 바람도 시원하다. 오월 중순 그것도 해질녘에 그녀의 뜰을 걷고 있노라면 일상에 지친 영혼이 비온뒤 풀잎처럼 파릇파릇 일어나는 것만 같다.     

     

연보라와 붉은 색 양귀비가 고고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작은 연못엔 연잎들이 아기 손바닥만큼 자라 반들거리고 있다. 그 속에 개구리들도 눈을 빠끔거리며 낯선 이들의 방문을 반기고 있다. 이맘 때 마치 의병을 일으키듯 일제히 피어나는 흰 꽃들에게 봉화라도 올리듯 고광나무 꽃이 하얗게 피어오르고, 으아리와 붉은인동꽃이 기둥에 기대어 맹렬하게 피어나고 있다.   

      

시인 신은숙은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라는 시에서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오듯 산사에 바람(風)이 불어 어떤 바람(願)도 남지 않듯 더는 부질없이 그리워하지 않으리’ 라고 노래했다. 어느 꽃은 지고 또 어느 꽃은 피어나는 시간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과 마주하고 있으니 가슴이 서늘해 지기도 하고 뜨거워지기도 한다. 귀하고 소중한 이 순간도 소유하려 들면 마음의 고통이 이는 법, 나는 그냥 물이 흘러가듯 내게서 흐르게 두기로 했다. 순간이 주는 선물을 음미하면서.   

      

우리 셋은 툇마루에 앉아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하늘과 전깃줄과 푸른 숲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속에 숨은 새소리가 어찌나 맑은지 나도 그들의 종족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바람이 차가워지자 우리는 거실로 들어갔다. J가 내주신 차를 마시고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거실에 불을 끄고 어둠이 빛을 밝히고, 빛이 어둠을 밝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푸른빛과 초록빛이 어둠 속에 안기고 달빛에 환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잠시 고요 속에 마음을 던져두었다. 눈가가 촉촉해 진다. 때론 어둠 속에서 빛의 존재가 선명하게 보이듯 필경 우리들은 고통 속에서 더 깊은 삶의 지혜를 배우고 깊어졌으리라.          

밤이 깊어지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J가 우리들에게 또 다른 비경으로 안내하였다. 꼭 이맘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 바로 무논의 풍경이다. 그녀의 집에서 오 분 거리인 화랑교육원에 차를 세워두고 훤하게 뚫린 논을 향해 걸었다. 하늘엔 보름달이 훤하게 비추고 있었다. 무논이 보이자 우리 셋은 일제히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달빛이 논마다 들어차 있었다. 어떤 곳엔 마치 물수제비처럼 빛 수제비 모양이 펼쳐졌다.      

    

무논이란 물이담긴 논이란 뜻으로 모내기 직전 잠깐 동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은 벼 대신 달빛과 주변의 가로등불이 논에 담겨 있었다. 빛이 나눠 담긴 모습과 무논에 반경으로 비춰진 가로등이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을 만들어댔다. 세찬 바람은 논가의 풀들과 나무들에게 신나게 춤을 추게 하였다. 우리도 스카프 자락을 흩날리며 바람과 하나가 되어 춤을 추었다. 자연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는 듯 했다. 호위병처럼 개구리가 ‘개골개골’ 울어대고, 우리들은 우주의 계시라도 받은 듯 황홀감에 빠졌다. 불빛과 바람의 향연에 나는 자유로워졌다. ‘바람(風)이 불어 어떤 바람(願)도 남지 않듯’ 욕심도 걱정도 다 내려놓고 까만 밤에 춤추는 길가의 풀들로 한참을 서 있었다. 어둠과 빛이 서로 손을 맞잡은 비경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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