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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Oct 17. 2017

20171017

산고, 파천황, 정초


1. 산고


1-1. 산고(産故)

아이를 낳는 일


1-2. 산고(産苦)

아이를 낳을 때에 느끼는 고통


1-3. 오늘 읽은 문장

오롯이 작가 손에서 만들어진 작품에만 작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주장에도 반대다. 다양한 사고와 문화와 예술이 존재하는 것처럼 회화의 다양성과 가능성도 열어 놓아야 한다고 본다. (...) 그럼에도 손으로 그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리는 쾌감에 깊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 구멍가게를 찾아 떠났던 길 위의 시간들과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내 그림의 든든한 자양분이다. 그 덕에 오늘도 지나치리만큼 더디고 촘촘한 작업을 기꺼이 끌어안고 있다. 산고 끝에 완성한 그림을 걸어 두고 보아 내 눈에 걸림이 없는 편안한 상태에 이르러야 마음이 놓이니 작가의 시선은 그림을 숙성시키기도 하나 보다.

-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글·그림, 남해의봄날, 2017.9., p.61.


*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작가 이미경이 20여 년 동안 전국 곳곳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섬세판 펜화로 그려 낸 구멍가게 판화들을 모으고, 중간중간 이미경 작가의 단상들도 모아 엮은 책이다. 최근 매일 몇 페이지씩 읽고 있다(한번에 다 보기에는 그림이 너무나도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매일 조금씩 아껴서 보고 있다). 오늘 읽은 페이지에 '산고'라는 단어가 나오는 단락이 있었는데, 위아래 맥락을 아무리 살펴도 사전에 등재된 '산고', 즉 '아이를 낳을 때에 느끼는 고통'의 의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위 인용해놓은 단락은 이미경 작가가 회화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논하는 <화가의 시선>이라는 소제목에 실린 단락이고, 아이를 낳는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나 편집자의 실수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산고'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어 '살아 있을 때 생생히 느끼는 고통'의 뜻으로도 쓰이는 건가? 좀 더 검색을 해보니 성경사전에 등재된 의미가‪ 나온다. "해산의 고통(창 35:16-17). 대개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사 13:8; 렘 50:43), 뼈를 깎는 노력(고후 11:27; 갈 4:19) 등을 의미한다(출처: 라이프성경사전/ 생명의 말씀사/ 2006)." 이제 알 수 있다. 이미경 작가는 '산고'를 '뼈를 깎는 노력'이라는 뜻으로 썼고, 실제로 '산고'가 사회에서 그러한 맥락으로 쓰이고 있음을. 좀 갸우뚱하게 된다. 가장 극심한 정도의 고통은 아이를 낳는 고통 외에도 많을 텐데. 이런 문장을 마주치면 언어의 역사성, 사회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언어는 종종 폭력적이다. 언어는 분명 무언가를 배제하고 무언가를 우위에 놓는다. 너무 거창한 생각인가. 하여튼 나는 아이를 낳을 일이 없으니 내가 '산고'를 극심한 고통의 의미로 말하고 쓸 일은 없을 것이다.


2. 파천황, 정초


2-1. 파천황(破天荒)

(주로 ‘파천황의’ 꼴로 쓰여)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해냄을 이르는 말. ≪북몽쇄언(北夢瑣言)≫에 나오는 말로, 중국 당나라의 형주(荊州) 지방에서 과거의 합격자가 없어 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은 혼돈한 상태라는 뜻으로 천황(天荒)이라고 불리었는데 유세(劉蛻)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합격하여 천황을 깼다는 데서 유래한다.


2-2. 정초(定礎)

사물의 기초를 잡아 정함.


2-3. 오늘 읽은 문장

오늘날 사회의 기본 제도와 원리들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들어섰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파천황의 기세로 이를 정초한 사상가들의 공이 컸다. 현대의 ‘고전’을 다시 들춰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의 커다란 표지판으로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 「[책과 삶]고전에서 들춰낸 ‘사회의 이정표」, 백승찬 기자, 경향신문, 2017.10.13.


* 백승찬 기자의 기사와 칼럼이 모여 있는 페이지를 즐겨찾기에 등록해놓았다. 매일 한두 편씩 읽을 것이다. 그의 글에는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지만 알고 보면 흥미롭고 재미있는 단어들이 꽤 많이 담겨 있다. 그가 쓰는 내용 또한 여타 기자나 작가들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전형적이고 식상하지 않으면서도 구성이 매우 정교하고, 깊이가 있으면서도 화려한 기교 없이 날렵하다. 백승찬 기자와 김혜리 평론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들이 써 내는 글에는 닮은 구석이 있다. 그들은 있는 사실을 결코 과장하지 않고, 글 속에 지나친 자기애를 담는 법도 없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상황들, 스크린 속의 폭력적이거나 괴로운 장면들을 오히려 냉정하고 간단명료하게 묘사한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장은 나를 몇 번이나 멈추게 하고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처연하고 고독한 삶의 진실은, 몸을 낮추어 티내지 않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들은 행간(行間)에서 탄생하는 의미의 힘이 얼마나 센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비스듬한 구석에서 몸을 낮춘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당당하고, 의연하고, 쉽게 당황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환희와 행복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내 삶의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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