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이, 속엣말
1-1. 승강이(昇降-)
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옥신각신하는 일.
¶ 접촉 사고로 운전자들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졌다./닷 냥을 도로 내라거니 안 주겠다거니, 뜰에서는 그것으로 승강이가 났다.≪김동인, 운현궁의 봄≫
1-2. 오늘 읽은 문장
병실 바깥에서 한바탕 소란이 인다. 치매가 심한 노인 하나가 고향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양이다. 간호사와 보호사들이 막아서고 언성을 높인다. 승강이하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구슬픈 노랫소리가 흘러들어 온다. 평생 전국을 떠돌며 각설이패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노인이 틀림없다. 작은 체구지만 힘이 넘치는 사람.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붙임성 있게 화장을 해 달라고 조르고 화장이 끝나면 언제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는 사람. 그럴 때 노인은 재능이 있고 아직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 『딸에 대하여』, 김혜진 장편소설, 민음사, 2017.9., pp.99-100.
* 아끼는 사람이 준 책 선물. 김혜진 작가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 민음사에서 출간된 신간이다. 한 달 만에 4쇄를 찍었으니 꽤 잘 팔리는 모양이다. 이틀간 집중력을 발휘하여 끝까지 다 읽었다. 초반에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흐름과 작가가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문장 형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중후반부에 화자(엄마)의 애통한 마음에 온몸을 이입하여 눈물 콧물 다 흘렸다는 소식을 전한다(민망). 이 소설은 퀴어 서사이면서도 퀴어 서사가 아니다. 이 소설은 퀴어인 딸의 시선이 아닌, 퀴어를 딸로 둔 엄마의 시선에서 쓰였다. 바로 이 점이 『딸에 대하여』의 가장 유효한 포인트일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엄마로 살아간 적 없음에도, 나는 이제껏 딸의 위치에서 살아왔음에도, 화자의 출구 없는 괴로움과 외로움에 깊이 이입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엄마. 엄마. 나의 엄마를 자꾸만 부르게 하는 소설. 엄마가 살아가는 삶의 리듬을 상상하게 하는 소설.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그녀의 구체적인 일상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상상해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위 소설 속의 한 단락 말마따나 우리 엄마도 작은 체구지만 힘이 넘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 같다. 우리 엄마는 노인 여성의 형상에 가까워지고 있고 앞으로 더욱 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질 테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내게 쭈글쭈글한 주름을 들이밀며 화장을 해 달라고 조르고, 화장이 끝나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늙어 가길 바란다. 늙음은 우울이 아니고 끝이 아니라서, 늙어가는 시간을 그 자체로 만끽하는 노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 속엣말
2-1. '속엣말'은 표준어가 아님을 밝히는 국립국어원의 답변(2011.5.)
질의하신 ‘속엣말’은 한 낱말이 아니므로 구의 형태로 ‘속에 말’ 또는 ‘속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2-2. '속엣말'이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2016.12.)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
¶ 속엣말을 하다/오면가면 들르는 막걸리 집에서 사람들은 텁텁한 농주 한 사발에 꼬인 속내를 풀어 버리고 알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속엣말을 하거나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그런데도 속엣말 한마디 않고 혼자 기뻐하는 게 슬며시 얄미웠다.≪오유권, 대지의 학대≫
2-3. 오늘 읽은 문장
최근 한 문화 연구자는 늘어나는 퀴어 서사가 "사회경제적 불안정이 비규범적 성 정체성이 초래하는 삶의 무게를 압도하는 것으로 재현"되는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서사는 결국 "성 소수자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경제동물의 형상을 경유하지 않고는 보통 사람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 사태"를 가리킨다. 최소한의 경제적 독립도 유지하기 어려운 레즈비언 딸 커플이 등장하는 이 소설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닐까. 딴에는 그렇다. 비록 속엣말이지만 화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 딸이 이렇게 차별받는 게 속이 상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그 애가 일터에서 쫓겨나고 돈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난 속에 처박히고 늙어서까지 나처럼 이런 고된 육체노동 속에 내던져질까 봐 두려워요. 그건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169쪽)
- 「실은, 어머니에 대하여」, 김신현경(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 대학원 박사후연구원), 『딸에 대하여』작품해설, 2017.9., pp.210-211.
* 김신현경 님이 위에서 인용한 문화 연구자는 오혜진 님이다(정확한 출처는 2017년 8월 6일 자 한겨레에 실린 칼럼「2030 잠금해제 - 퀴어 서사와 아포칼립스적 상상력」). 퀴어 서사에 대한 오혜진 문화 연구자의 분석은 정확해 보인다. 퀴어라는 소위 '비규범적', '비정상적' 정체성 그 자체를 다루는 서사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동성애도 사랑이에요'라는 말은 한물 간 구호가 됐다. 사랑 또는 연인의 자격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제를 논할 여유와 시간이 없다. 대신 '성소수자도 사람답게 일할 권리'를 말한다. 이제 '우리 회사에도 퀴어가 있어요'가 퀴어들의 삶에 더 유효한 구호가 되었다. 그러니 요즘의 퀴어 서사는 애절한 사랑의 서사가 아니라, 퀴어가 일상적으로 놓여 있는 "사회경제적 불안정"의 사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오혜진 연구자의 말마따나 사회는 이제 "경제동물의 형상을 경유하지 않고는 보통 사람을 상상하지 못하"기에, 이성애 가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기혼 여성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쳐질 수밖에 없는 레즈비언 여성들은 사랑의 형태뿐만이 아닌 경제적 조건에 있어서도 '보통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도, 품위를 지키는 삶이 무엇인지『딸에 대하여』는 묻고 있다. 딸이 아닌 엄마(들)에게 묻고 있다. 소설 속 엄마는 자신의 존재와 딸의 존재를 번갈아 사랑하고 증오한다. 그러나 애증이란 어쩌면 너무나 사랑하기에 생기는 문제다. 그녀는 딸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는다(놓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잔인한 상황들이 던지는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지닌 힘은 이것이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좌절하고 자신의 처지를 혐오하지만, 뒤로 도망가지 않는다. 그녀는 달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울고, 애원하고, 또 달린다. 소설 초중반까지 그녀의 말은 대부분 독백이다. 그러나 자신이 보살피던 노인 '젠'을 아무 부대낌 없이 받아들이는 딸의 동성 연인을 며칠간 지켜보던 그녀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있어 줘서 고맙구나." 밖으로 꺼낸 그 말을 시작으로 그녀는 자신의 속엣말, 그러니까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들을 딸과, 딸의 연인에게 조금씩 꺼내게 될 것이다. 그 말들은 가시 돋힌 것처럼 날카롭다가도, 딸과 연인이 지켜 내는 삶의 품위와 함께 보낼 시간의 무게에 힘입어 평평하게 다듬어질 것이다.
시간 강사로 살아가는 딸, 요양원 보호사로 일하는 엄마, 딸의 동성 연인, 딸과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 강사 동료(들), 엄마가 보살피는 노인 여성, 엄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 보호사(들), 그 주변의 여성, 여성들을 생각한다……. 아직도 여성은 '보조, 보살핌, 돌봄'의 필수 주체이면서 사회 중심부(남성, 돈, 권력)로부터는 배제된다는 김신현경의 작품 해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이 명제는 운명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라는 것도. 그러니 이 퍽퍽한 현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여성과 여성의 연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여성들의 존재 그 자체일 것임을. 나는 이 소설이 지금의 현실,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귀한 일인지 새삼 놀라고 있다. 김혜진 작가에게, 민음사 편집부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