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첫 명절, 언택트 시댁

by 언언


오랜 친구 예지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옆집에 살던 예지와 인생의 굵직굵직한 시간을 함께 해왔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놀이터에서 뛰어놀았고, 한 겨울에 아지트를 만든다며 길거리에서 박스를 주워오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가족들 흉도 보고, 성적 고민이나 친구들 얘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예지의 옆집에 살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만큼 친해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집안도.


쿰쿰한 반지하에 엄마와 두 동생들과 함께 살던 나와 달리 예지의 집은 늘 넓고 깨끗했다. 신축 빌라에 부모님과 오빠, 예지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이스크림 사 먹을 돈도 넉넉지 않았던 나를 위해 예지는 자주 아이스크림 두 개를 계산했다. 예지는 그런 애였다. 반에서 왕따를 당하는 친구가 있으면 늘 나서서 챙기는 사람. 그 때문에 자기도 왕따를 당할지언정 친구를 버리지 않는 사람. 의리 있는 사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교가 달라졌고 우리 집도 반지하를 탈출했다. 우리는 때때로 만나 다이어트를 한다며 줄넘기를 돌렸고, 주말이면 서울에 유명 대학교를 돌아다녔다. 수능을 잘 봐서 함께 신촌으로 오자고, 방을 구해 함께 살자고 약속했다. 집안일은 내가, 돈은 네가 벌어오라는 말로 힘든 고 3 시절을 버텼다. 기대만큼 수능을 잘 보지 못해 나는 재수학원으로, 예지는 지방에 있는 대학교로 떠났다. 각자 사는 일이 바빠 정말 오랜만에 만남이었다.


스타벅스 커피를 앞에 놓고 예지가 청첩장을 건넸다. 코찔찔이였던 우리가 결혼을 얘기하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예지가 말했다.


"근데 나 결혼하면 명절 어떡하지? 나 전 부쳐본 적 없단 말이야. 벌써부터 걱정된다니까.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우리는 명절에 안 갈 것 같은데.. 그냥 명절 전후로 함께 식사하고 말 거야."


문득 궁금해졌다. 남자들도 결혼을 앞두고 결혼 후 달라질 명절을 걱정하는지.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하고, 손님을 대접하는데 없던 부담감이 생길는지.





그즈음 설날을 맞아 오랜 남사친 대현이에게 물었다.


"너도 고향 내려가면 전 붙이나?"


"일찍 내려가면 부치고 늦게 내려가면 안 부치지"


대현이의 고향은 경북 포항이다. 직장이 서울이라 가는 길이 못해도 다섯 시간은 걸린다. 명절에 차가 막히면 하루 종일도 걸린단다.


"포항까지 가려면 힘들겠다 차도 막힐 텐데"


"집 멀어서 놀리냐 나중에 너 결혼해서 전 부칠 때 놀려줄게" (이게 놀림거리가 될 일인가)


"나는 결혼해도 지금처럼 살 건데. 힘든 일을 억지로 하지는 않을 거야. 나랑 지태는 먼저 자기가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 함께해도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지. 서로를 힘들게 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아."


"사랑이란 말이 없군. 결혼 멀었네."


"네가 생각하는 사랑은 뭔데.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거야."




나는 혼자 살 때도 명절에 전을 부쳐 먹었다. 지태와 만나고부터는 함께 명절 요리를 했다. 주변에 혼자 계시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전 한 접시 드리고 오는 건 명절 일과였다. 그러니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게 되더라도 억지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상대방의 희생이 당연시되고 강요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비워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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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태와 명절 요리



이번 추석에도 우리는 전을 부쳤다. 멀리 계신 지태의 부모님에겐 전화로만 안부를 전했다. 코로나 때문에 결혼 후 첫 명절은 언택트 시댁이 되었다. 코로나가 끝나도 명절 전후로 시골에 내려가 식사를 하고 올라올 테니 앞으로도 명절 스트레스는 받지 않을 거다. 그런 나를 보고 15년 전에 결혼한 친한 언니가 말했다. "부럽다. 진짜 진짜 부럽다"라고.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명절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명절이 그저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명절에 시댁이나 친정에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만남이 언제나 기쁨이 된다면, 서로를 진정 사랑으로 배려하는 관계라면. 명절 노동이 뭔 대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