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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언 Aug 08. 2022

연인에서 전우로 변하다

네팔 ABC 트레킹 4


생리를 시작했다. 타이레놀을 먹었는데도 생리통이 점점 심해졌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냐.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단 말이다. 아프면 안 된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배가 당겼다. 허리와 골반을 초대형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지태는 내 가방까지 두 개를 겹쳐 메고 걷기 시작했다. 연인에서 전우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던가. 나에겐 히말라야가 그렇다. 체력과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보인 지 오래고 가져온 현금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혹시라도 돈이 부족할까 봐 가난한 트레킹을 하고 있다. 골반은 삐거덕거리고 정강이와 발목은 통증이 날로 심해진다. 절름발이처럼 다리를 질질 끌며 하산하고 있다. 힘든 건 지태도 마찬가지일 텐데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이 남자가 오늘은 좀 달라 보인다.


며칠 전, 지태가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 사탕을 까먹으려고 장갑을 벗어서 주머니에 넣고 걸었는데 장갑 두 짝을 모두 떨어뜨린 것이다. 다행히 한 짝은 금방 찾았는데 나머지 한 짝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걸어오던 등산객 한 명이 말을 걸었다. 혹시 빨간 장갑을 찾는 거라면 몇 시간 전에 봤으니 포기하라고. 그때도 지태는 화를 내는 대신 발 구린내 나는 양말을 손에 끼고 다녔다. 일주일 내내 신던 양말이었다. 트레킹 도중 장갑을 파는 상점을 찾았지만 산 물가는 터무니없이 비쌌고 주머니가 얇은 우리는 장갑 대신 양말을 택했다.


[좌] 회색 양말의 사나이 [우] 손 치워 지태야


“우리 둘 중 한 명이 고산병이 심해서 다른 한 명이 정상을 포기해야 하면 어떻게 하지? 너무 아쉬울 것 같은데.”


정상을 코앞에 두고 남편의 고산 증세가 심해져 정상에 가지 못해 화가 난 나머지, 부부싸움을 했다는 어느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고 지태에게 물었다. 지태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지 어쩌겠냐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실제로 정상을 코앞에 두고 나에게 고산 증세가 왔을 때 지태는 무리하지 말라며 언제든 내려가도 자기는 괜찮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비난하는 대신 내 건강을 먼저 챙기는 모습에 어떤 확신이 생겼다. 이 남자라면 한 번 믿어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확신.


이혼한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커서 이혼할 확률이 높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확실한 통계가 있는 건지 카더라 통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내 마음에 오래 남아 나를 괴롭혔다. 불행한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다가올 나의 미래 같았다.

그래도 이 남자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의 부모는 행복한 결혼 생활에 실패했지만 어쩌면 나의 인생은 다르지 않을까. 지태와 함께라면 결혼이란 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마을에 들려 생리대를 샀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이라더니 이 깊은 산골짜기 상점도 웬만한 것은 다 있다. 초코파이와 신라면은 물론 네팔 현지인이 담근 김치와 김치찌개까지. 심지어 우리 할머니가 담근 김치보다 더 맛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이곳에 오는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지프를 탈 수 있는 마지막 마을, 맛큐에 도착했다. 트레킹 끝! 오늘 저녁은 삼겹살이다!



번외

“내가 ABC 다신 오나벼, 다신 안 올 거여! 다신!”

함께 하산하며 친해진 아저씨가 넌더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한라산, 지리산, 동네 뒷산까지 한국에 있는 산은 다 타봤는데 한국이 제일 좋은 거 가터~ 밤새 고산병 때문에 계속 토해써! 내가 죽으면 헬기 불러요! 했다니까! 어휴! 빨리 내려가고 싶어, 어휴! 여기 다신 안 올거여, 어휴!”

‘저도요 아저씨... 이번 생에 ABC는 한 번이면 족해요.’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간 기념 연재는 매주 월요일 브런치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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