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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덴 Jul 11. 2017

정의를 위한 한 개인의 담대한 용기

[고덴의 영화읽기 7]  <스노든>

궁금했다. 특정 언론에서는 무려 130만 명이나 모인다고 했다. 충분히 예측 가능하기도 하고 보도에서 본 내용과 크게 다를 건 없겠지만 그들은 도대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 시청 광장과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이는 태극기 집회 이야기다. 평소 촛불을 들러 나가는 저녁 시간보다 좀 일찍 나가서 태극기 집회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봤다. 



다년간 대규모 페스티벌과 여러 집회를 참석하며 생긴 눈대중으로 판단하기에 태극기 집회의 규모는 8~10만 정도로 추산이 됐다.(물론 70만이 모였다는 촛불 집회의 규모도 다소 과장되어 보도된 감이 있다.) 대략의 셈을 마친 그 순간 마이크를 잡은 연사는 210만 명이 모였다고 외치며 군중을 흥분시켰다.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군가 ‘최후의 5분’이 흘러나오며 고조된 열기를 이어갔다. 노래에 맞춰 태극기를 힘차게 흔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종북 세력을 타파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던 그들의 모습에서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흡사 북한의 열병식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수많은 ‘에드워드 스노든’들을 만날 수 있었다. 


프리즘 폭로 사건



2013년 6월에는 국제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일명 ‘프리즘 폭로 사건’. 전직 CIA 요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영국의 정보기관 GCHQ 등이 대(對)테러방지를 명목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통화기록과 인터넷 사용기록 등을 프리즘(PRISM)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사찰해왔던 사실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또한 NSA가 유럽연합(EU)과 미국이 주재한 38개국의 대사관도 도·감청을 해왔다고 밝혔다. 

이에 미국 오바마 정부는 스노든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몰며 프리즘의 합법성에 위배되는 이야기는 모두 루머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스노든은 미 정부의 성명이 나올 때마다 계속해서 충격적인 사실을 터뜨리며 결국 여론을 본인 쪽으로 돌려세웠다. 결국 미 정부는 부분적으로 사실을 시인했  지만 스노든에 대해서는 간첩죄를 적용시킬 계획이었기에 스노든은 러시아로 망명을 신청했다. 문제는 러시아가 스노든의 망명을 받아주며 미-러 양국 간의 국제사회 속 긴장감이 고조되었다는 것이다. 스노든 한 개인이 정의를 위해 보인 용기의 파장은 생각보다 매우 컸다.  


무엇이 애국인지



10대 시절 9.11 테러를 목격한 스노든은 30년간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장교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위해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특수부대에 들어간 그는 훈련 도중 사고가 나서 의가사 제대를 하고만다. 그럼에도 꺼지지 않은 애국심에 명석한 두뇌와 컴퓨터 실력으로 사이버보안을 담당하는 부서로 들어가게 되고 후에 프리즘 프로젝트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목격하며 자신 또한 자유가 박탈당할 수 있음에 위협을 느낀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빅브라더를 직접 본 것이다. 스노든은 무엇이 애국인지 다시 고민하게 됐다. 국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이렇게 모든 걸 감시해도 되는 것인지 가치관의 혼란이 왔다. 결국 그는 목숨을 걸고 내부 고발자가 되기로 마음 먹는다.


이 영화는 월남전을 그린 전쟁영화의 마스터피스 <플래툰>과 존 F.케네디의 암살을 다룬 <JFK>를 연출하며 사회 고발에 관심이 많던 거장 올리버 스톤이 다시 메가폰을 잡으며 시작됐다. 스노든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시티즌 포>가 이미 나와있는 상황에서 감독은 조금은 달리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티즌 포>가 다큐멘터리 영화답게 사건의 사실에 대해 집중했다면 <스노든>은 애국심과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인물에 집중했다. 어린 20대 청년의 사색을 조셉 고든 래빗은 무난히 소화해냈다. 영화 속에서 거대한 감시 시스템과 그를 관리하는 수많은 인재들이 묘사된 모습은 민간인 사찰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끔하는 부분들이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시청 광장에도 수많은 스노든들이 있었다. 당연히 내부 고발자가 되기 전의 스노든이다. 그들은 ‘애국’이란 커다란 명제 속에서 현재 수많은 피의자들을 비호하고 있다. 그들의 비호 대상들도 마찬가지다. 민간인을 사찰하고 댓글을 조작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요시찰인들을 따로 모아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애국인 것인가. 과연 태극기는 지금 올바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이 든다. 


이에 모든 진실을 밝힌 스노든이 과거에 했던 말에서 해답을 구해본다. “미국 정부가 날 감옥에 보내거나 죽인다해도 이 진실을 감출 수는 없으며 다가오는 진실을 막을 방도는 없다.” 그렇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애써 진실을 외면하지 말자. 태극기를 드는 것만이 용기있는 행동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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