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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덴 Jul 11. 2017

왔노라 보았노라 잘못 불렀노라

[고덴의 영화읽기 10]  89회 아카데미 시상식 관전 포인트 되짚어보기

올 해의 오스카(아카데미 시상식의 별칭)는 마냥 하얗지 않았다. 지난 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SNS상에서 #oscarsowhite란 해시태그로 놀림감이 되었다. 주요 부문 후보에 백인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해는 확실히 달랐다. 진행자인 코미디언 지미 키멜은 이게 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덕분이라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트럼프의 반(反)이민정책을 비꼬는 것이었다. 현지 시간으로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부분들을 되돌아보자.


작품상은 라라랜드? 문라이트? 


작품상이 3분만에 <라라랜드>에서 <문라이트>로 바뀌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최대의 화두는 <라라랜드>의 독주를 <문라이트>가 과연 얼마나 막아낼 것인가였다. <라라랜드>는 이번 시상식에만 13개 부문 14개 후보를 올리며 독주를 예고했다. 이는 아카데미 역사상 <이브의 모든 것> <타이타닉>과 함께 최다 후보 지명의 기록이다. <문라이트>는 지난 한 해, 세계 유수의 시상식 59곳에서 158관왕이란 괴력을 발휘했고 이번 아카데미에서도 8개 부문 후보에 지목이 되며 사람들의 기대감을 다시 한 번 모았다.


역시 가장 큰 화두는 시상식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작품상 수상이었다. 쇼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우수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전 세계의 관객들은 주목했다. 시상은 이제는 노인이 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두 주인공 워렌 비티와 페이 다나웨이가 맡았다. 수상자 봉투를 뜯은 워렌 비티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뜸을 들였고 발표를 페이 다나웨이에게 넘겼다. “라라랜드!” 페이 다나웨이는 외쳤고 뜨거운 박수 속에 모든 <라라랜드>의 배우와 연출진이 무대에 올라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무대 위로 오른 시상식 스태프는 봉투가 잘못 전달되었음을 알렸고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영광의 주인공이 <문라이트>로 바뀌었다. 시상자들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엠마 스톤의 이름이 적힌 봉투가 다시 전달되었고 이를 착각한 페이 다나웨이는 그녀가 주연을 맡은 작품 <라라랜드>를 외쳤던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답지 않은 최악의 실수였다. 웃으며 넘기기에는 무대를 다시 내려가는 <라라랜드>팀의 당혹감을 배제할 수 없었다. 또한 아카데미 측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영화인들을 조명하는 자리에서 생존해있는 다른 인물의 사진을 올리는 실수도 범했다. 분명 내년 시상식에서 이런 자신들의 실수를 꼬집는 셀프 디스를 유쾌하게 선보일게 뻔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다시는 이런 실수가 안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국 <문라이트>가 시상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흑인이자 동성애자인 주인공을 내세운 이야기가 선택을 받은 것을 통해 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다시금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최연소 감독상이냐 최초의 흑인 감독상이냐


<라라랜드>의 데미안 샤젤이 감독상을 수상하며 최연소 감독상 수상자 기록도 함께 세우게 됐다.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작품상 대결과 함께 가장 관심을 끌었던 부문은 감독상이었다. 두 작품의 수장인 <라라랜드>의 데미안 샤젤과 <문라이트>의 베리 젱킨스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둘 모두 30대의 젊은 감독이라는 점과 이번 후보작들이 모두 그들의 두 번째 장편영화라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둘 중 누가 받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의미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데미안 샤젤이 받으면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 감독상 수상자가 되는 것이고, 베리 젱킨스가 받으면 아카데미 역사 최초의 흑인 감독상 수상자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오스카는 작품상을 <문라이트>에게 주는 대신 최연소 감독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앞으로 두 젊은 거장의 행보가 기대된다.


트럼프 풍자쇼 


시상식의 진행자 코미디언 지미 키멜이 시상식 도중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트위터를 보내고 있다.


할리우드가 기반을 두고 있는 LA와 캘리포니아 주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표밭이다. 그런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에서 온 수많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이민자를 적대하는 정책의 트럼프 미 대통령을 지지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이번 시상식에서 가장 꾸준히 언급된 이름이 트럼프였다. 수많은 할리우드의 문화예술인은 턱시도와 드레스에 ‘파란 리본’을 달고 나왔다.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약자인 ACLU가 리본에 글자로 새겨져있었다. 이 단체는 미국 내 모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하고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운영되며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에 저항하고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참석자들의 파란 리본들을 비추며 공개적으로 트럼프에 대한 반항을 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진행자 지미 키멜은 시상식 도중 공개적으로 트럼프에게 트위터를 보냈다. 지금 방송을 보고 있냐고 묻는 것과 동시에 메릴 스트립이 안부를 전한다고 전하며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웃음을 샀다. 메릴 스트립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전에 있었던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통해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에 트럼프는 그녀를 ‘과대평가된(overrated)' 배우라며 맞대응했다. 그래서 지미 키멜은 둘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투로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3시간 여의 시상식 전체를 관통하는 한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면 '안티(Anti) 트럼프'라고 할 수 있겠다.


논란의 수상자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시 애플렉. 그의 수상에 뒷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작년 우리나라의 청룡영화제 남녀 주연상은 이병헌과 김민희가 수상했다. 이에 많은 영화팬들은 그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하지만 과연 소음이 많았던 그들의 사생활은 온전히 배제하고 상을 줘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유사한 분위기가 있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에서도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던 케이시 애플렉의 이야기다.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 그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맞게 오스카 트로피도 거머쥐었다. 


하지만 케이시 애플렉은 2010년 본인이 연출했던 영화 <아임 스틸 히어>의 여성 스태프 두 명을 성희롱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혐의를 부인해왔지만 두 사람과 합의를 하며 사실상 혐의에 대한 시인을 했다. 남우주연상 시상은 전년도 여우주연상 수상자 브리 라슨이 했는데 공교롭게도 브리 라슨은 작년 <룸>이란 영화에서 납치와 성폭력을 당하는 여성을 연기했다.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되었고 케이시 애플렉 역시 기쁨을 애써 절제하는 느낌이 보였다. 한 개인의 공을 치하할 때 그의 능력과 사생활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는 당분간 논란이 이어질 듯하다. 


쉼 없이 유쾌한 시상식 


시상자로 나선 밴 애플렉(左)과 맷 데이먼(右). 맷 데이먼의 멘트 도중 지미 키멜은 음악을 지휘하며 그의 멘트를 방해했다.


시상식은 시종 유쾌했다. 특히 진행자 지미 키멜과 맷 데이먼은 평소 앙숙 컨셉으로 지내는 것으로 유명한데 잊을만하면 나타나 함께 웃음을 유발했다. 이를테면 맷 데이먼이 지나가는 지미 키멜의 다리를 건다든지 시상을 하러 올라온 맷 데이먼이 멘트를 하는 중 지미 키멜이 음악을 틀며 차례를 넘기는 등 둘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계속 이어졌다. 과거 청룡영화제에서 진행자인 정준호와 그의 파트너 신현준이 몇 해간 보여준 모습과 유사했다.


그리고 할리우드 관광버스를 탄 관광객들이 영문도 모른채 갑자기 예정에 없던 아카데미 시상식장으로 들어오게 되며 그들은 전 세계로 송출되는 생방송에 출연하게 됐다. 관광객 중 약혼을 한 부부를 위해 덴젤 워싱턴이 즉흥으로 성혼선언문을 말한 장면이 백미였다. 이외에도 객석의 영화인들과 관객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겠다며 천장에서 낙하산을 매단 사탕과 팝콘을 내려줬는데 그 때 흘러나온 음악이 <지옥의 묵시록>의 그 유명한 헬리콥터신에서 나온 바그너의 교향곡이었다. 정말 아카데미스러웠다.


전통과 명예에 어울리지 않는 실수들이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관전 포인트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은 올 해도 역시 다채로웠고 만족스러웠다. 단순히 트로피를 주고받는 행위의 연속이 아닌, 잘 짜여진 한 편의 쇼를 보여주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며 아직 뚜렷한 색깔을 갖지 못 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중문화계의 시상식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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