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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덴 Jul 11. 2017

그 남자는 아픔을 참아야만 했다

[고덴의 영화읽기 12]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나오는 가상의 공간 ‘무진’은 주인공에게 특별한 곳이다. 얼룩진 과거가 스며들어있는 곳임과 동시에 출세하고 자리잡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기도 하다. 반면 주인공과 무진에서 밀회를 즐긴 음악교사 하인숙에게는 그 공간의 의미가 반대일 것이다. 그녀에게는 무진이라는 시골이 일상이고 서울은 주인공과 함께 떠나고 싶은 해방구일테니. 같은 장소지만 각자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람들은 다르다. 왠지 잘은 모르겠지만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에게도 ‘귀향’은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인가보다. 그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아물지 않는 상처



추운 겨울 아파트의 잡역부를 맡고있는 한 남자가 눈을 치우고 있다.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의 고향은 맨체스터. 과거 박지성이 활약하던 영국의 축구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그 맨체스터는 아니다. 미국 동부의 아주 작은 해안마을이다. 형의 부고를 전해받은 그에게 고향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형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조카와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그 속에서 교차편집을 통해 주인공의 과거가 함께 삽입되는데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행복했던 주인공의 과거와 그럼에도 그가 왜 맨체스터를 떠나야했는지, 왜 그렇게 건조한 성격을 가지게 됐는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관객들은 점차 그의 아픔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영화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자세한 내용은 서술하지 못 하지만, 소중한 사람 셋을 떠나보낸 주인공은 그 사건 이후 웃음을 잃게 됐다. 한 없이 메말라버린 그는 예전에는 장난도 많이 쳤던 조카에게도 쌀쌀하다. 철이 안 든 조카 역시 삼촌이 그리 살갑지는 않다. 조카는 철이 없는 건지 아버지가 떠난 슬픔보다는 친구들과의 밴드 활동과 여자친구와의 거사에 더 혈안이다. 동생은 형의 장례 절차를 얼른 끝마치고 싶을 뿐이다. 맨체스터는 그에게 버티기 그리 녹록지가 않은 곳이다. 


차갑지만 따뜻한 위로 



이 영화의 제목을 장난삼아 <나,리 챈들러>로 바꿔도 큰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켄 로치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다니엘 블레이크>의 패러디다. <나,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수리공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을 까칠하게 대한다. 그 역시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기에 그렇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인 리 챈들러가 후에 나이를 먹으면 다니엘 블레이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큰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아픔과 상처를 지닌 이야기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니엘 블레이크>와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이 두 작품은 그 고통을 발산하지 않고 수렴한다. 오히려 관객들은 격정적인 감정 표현보다는 주인공들이 슬픔을 꾹꾹 눌러 담으려는 모습에서 더 아픔을 함께 느낄지도 모른다. 맨체스터의 추운 겨울 바다가 주는 쓸쓸함은 그 고통을 더 배가시킨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나를 안아줄 때 느끼는 위로보다도 두 영화의 위로 방식은 차가워보이나 오히려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더 따뜻이 녹여준다.


얼어붙은 땅이 녹듯이 


장례 절차를 밟던 리는 놀라게 된다. 형이 조카의 후견인으로 본인을 선택해놨던 것이다. 리는 수긍할 수 없었다. 조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소중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상처가 아물지 않은 리에게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고통을 넘어 공포다. 하지만 최대한 노력을 해본다. 조카의 완전한 보호자가 될 자신은 없지만 절차적으로 그는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기 시작한다. 그런다고 그의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픈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이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리는 어렵지만 그 길을 택한 것이다.


맨체스터의 혹한이 풀리며 얼어붙은 땅이 녹았다. 녹지않은 땅을 깨지못해 냉동고에 보관했던 형의 시신을 드디어 땅 아래에 편히 묻어줬다. 대개의 영화는 큰 문제가 해결이 되면 변화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동생 리는 담담하고 건조하다. 애써 슬픔을 봉합하지 않는 리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런 냉소적인 인물을 케이시 애플렉은 훌륭히 소화해냈고 결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란 보상을 받았다. 그의 수상으로 인해 관객들의 궁금증이 커지며 상영관이 많진 않아도 상영기간이 연장된 느낌이다.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가 필요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놓치지 않는게 좋다. 


우리들은 모두 각자 의미가 다른 장소와 사람들과 함께 부대껴서 살아간다. 이는 당연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얼어붙은 땅이 녹듯이 우리의 삶은 정해진 순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곳에도 3월이 되며 땅이 녹고 그 위로 새 생명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 하루도 살아간다. 멈추지 않고 계속 파도치는 맨체스터 바다의 파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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