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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덴 Jul 11. 2017

먹고 살기 힘들어 자발적으로 들어간 정신병원, 그러나

[고덴의 영화읽기 14]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요즘 들어 사회면에서는 씁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고들이 왕왕 보인다. 며칠 전 충북 음성에서는 흉기를 든 20대 남성이 종업원으로부터 현금을 빼앗은 뒤 도주하지 않고 도리어 본인을 경찰에 신고하라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준비하는 사업이 잘 되지 않아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교도소로 가려는 술수였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심심찮게 자발적으로 교도소를 가려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죄 소식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위와 같은 ‘자발적 교도소행’ 범죄는 본인의 의식주를 해결하며 신체적인 자유를 얻는 미봉책은 될 수 있겠으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규칙과 규범이 깨지는 결코 득이 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없다. 개인의 딱한 사정을 고려하기엔 사회 구성원 간의 약속은 너무도 명확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증가하는 사회의 움직임을 보면서, 이 현상들을 비단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볼 수만은 없는 공공의 선이 수면 위로 오르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문도 든다. 


자유를 찾아서 왔으나



여기 또 한 사람의 자발적 범죄자가 있다. 이름은 랜들 맥머피(잭 니콜슨). 맥머피는 이미 상습범으로서 감옥을 자주 드나드는 수감자였다. 그 역시 세상살이가 너무도 힘이 들어 감옥을 드나들던 부랑자였다. 그런 그가 하루는 머리를 굴려 감옥보다 수감생활을 더 편히 할 수 있는 정신병원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결국에는 그 곳으로 이송이 된다.


자유를 찾아서 온 정신병원. 하지만 그 곳은 예상과 달리 모든 것이 통제되고 억압되는 곳이었다. 병원의 총괄을 맡는 수간호사 랫체드(루이즈 플레쳐)는 관리와 통솔의 범위를 넘어 수많은 정신질환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고 그들에게 정신적인 폭력까지 가하고 있었다. 당연히 환자들에게 수간호사는 공포의 대상이다. 맥머피는 모두가 과도하게 그녀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을 느낀다. 그리고 결심한다. 그녀가 세운 성을 무너뜨리기로. 


맥머피는 환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몰래 그들을 데리고 무단 외박을 하며 일탈의 기회를 준다. 당연히 랫체드에게 맥머피는 눈엣가시가 된다. 이에 굴하지 않고 무리의 대장은 병원에서도 파티를 벌이는 대담함을 보인다. 결국 자신의 성이 함락될 것 같은 불안감에 수간호사는 그에게 가장 높은 강도의 제재를 가하게 된다.   


과연 맥머피와 일당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맥머피는 죗값을 치러야하는 범죄자다. 사회적으로 그는 옹호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잘못된 체제와 시스템에 대항하는 그를 보며 어느새 그를 응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동시에 그 모습이 부분적으로는 현실 속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씁쓸함도 함께 느껴지는 순간도 영화는 제시한다. 


아카데미 주요 5부문 석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작가 켄 키지가 1962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3년 후 원작을 각색해 만든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5부문을 석권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참고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5부문은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각본상 또는 각색상이다. 각본과 각색의 차이는 원작인 이야기면 각본, 원작을 재구성하면 각색에 해당한다. 둘 중 한 경우라도 상을 받으면 주요 5부문에 포함이 된다. 쉽게 말해 대본의 훌륭함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89년의 아카데미 역사에서 주요 5부문을 모두 수상한 작품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양들의 침묵(1991)> 단 세 작품밖에 없다. 


특히 영화의 원톱을 맡은 배우 잭 니콜슨의 실력발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관객에게는 매우 큰 흥미요소다. 잭 니콜슨은 헐리우드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가 없는 배우다. 말론 브란도 이후 동세대에서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더스틴 호프만과 함께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인 배우가 잭 니콜슨이다. 한 번도 받기 힘들다는 아카데미 연기상을 무려 두 번의 남우주연상과 한 번의 남우조연상으로 총 세 번이나 받은 대체불가의 배우다. 그의 찬란한 전성기를 감상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영화는 다시 볼 가치가 있다.


뻐꾸기에게 둥지는 없다



여러 영화와 소설들에서 체제와 대립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유독 이 작품이 그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들의 상징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분명 제목이 차지하는 영향이 역시 매우 클 것이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는 개인들에게 박수를 쳐줬다.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이 돋보인다는 의미는 뒤집어 얘기하면 그들이 속한 시스템이 그만큼 무너져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원작자 켄 키지는 그 시스템을 ‘뻐꾸기 둥지’로, 그 시스템을 벗어나려는 자유의지들을 ‘새’로 비유했다.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을 잘못된 질서의 집합을 꼬집기에 한 줄의 제목이 가진 문학성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뻐꾸기에게는 둥지가 없다. 알을 자신의 둥지에 낳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위탁하며 낳는 것을 탁란이라고 하는데, 뻐꾸기는 대표적인 탁란조다. ‘뻐꾸기 둥지’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셈이다. 즉 이 모순된 제목은 둥지 자체가 없는 뻐꾸기들을 억지로 모아 넣어놓은 장소(정신병원)의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서두에 언급된 먹고 살기가 힘들어 있지도 않은 둥지로 자진해 들어가는 요즘 우리 사회 속 뻐꾸기들의 이야기가 괜히 겹쳐 보인다. 그들의 선택은 과연 옳았던 것일까. 과연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면 그런 선택이 종용되는 뻐꾸기들의 생태계는 현재 괜찮은 것일까. 


아무리 적자가 되지 못한 종이 사라지는게 생태계의 순리라고 한들, 인간사회만큼은 그들이 경쟁에서는 뒤지더라도 스스로 진화를 포기하기까지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의무가 있다. 사회적으로 증가하는 자발적 교도소행 문제를 그저 일시적인 현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갇혀있는 뻐꾸기들이 다시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세상이 하루 빨리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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