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덴 Jul 11. 2017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면 뭘 없앨래?

[고덴의 영화읽기 17]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이 쓴 소설 <사물들>은 1960년대 프랑스 파리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소비사회로 탈바꿈이 되는 시대상을 묘사한다. 기술의 발달로 공항이 새로 문을 열고 광고에는 각종 전자제품들이 등장했으며 사람들에게 패션에 대한 관심도 유발했다. 특정 상류층 계급만이 누릴 수 있던 소비 생활 패턴을 많은 사람들이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복’이란 단어를 ‘사물들’과 동일시하며 돈으로 사물을 구매함으로써 행복을 소유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서 ‘욜로족(YOLO族)’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들린다.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당신의 인생은 딱 한 번뿐)’를 줄인 것으로서, 한 번 사는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미래의 행복보다는 당장 눈앞의 행복을 더 추구하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보다는 자신을 위해,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는 소비에 더 중점을 둔다. 물론 구매력에 따라 정도는 다르겠지만 소비와 소유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이 현상은 60년대 파리의 그것과 유사해보인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얻으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반대로 소유하고 있던 ‘사물들’이 사라질 때 행복의 양은 줄어들게 되는 걸까?


일생일대의 거래



갑작스레 뇌종양 판단을 받아 충격에 빠진 한 청년의 눈앞에 자신과 똑닮은 사람이 등장했다. 거울을 보는 것만 같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저승사자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사자(使者)는 주인공이 내일 바로 이 세상과 이별을 고하게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대신 주인공에게 일생일대의 거래를 제시한다. 하루를 더 살게 해줄테니 사자 본인이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나 없애겠다고 한다. 


주인공은 이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럽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의사도 묻지 않고 사자는 주인공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보고서는 전화를 없애야겠다고 결정한다. 하루를 더 살게 됐으니 마지막 통화를 즐기라고 말하며 그는 홀연히 사라진다. 누구에게 마지막 전화를 해야할까. 전화번호부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있다. 고민 끝에 주인공은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하나씩 사라지는 사물들



생명이 연장된 첫째 날이자 인생의 마지막 날, 오랜만에 만난 전 여자친구와는 좀 서먹하다가도 금세 편안해졌다. 둘은 우연히 잘못 걸려온 전화 때문에 인연이 시작됐다. 집에서 영화를 보던 주인공은 전 여자친구가 잘못 건 전화로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잘못 걸린 전화임을 알고 수화기를 내리려는 찰나 여자는 수화기 너머 소리만 듣고 주인공이 보던 영화의 제목을 맞추게 된다. 그렇게 둘은 금방 연인이 되었다. 그 때의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둘은 서로 사랑할 수 없었다.


주인공은 해후한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며 본인이 뇌종양에 걸린 사실을 전하고 아쉬움을 뒤로한다. 머지않아 사자가 나타났다. 사자는 주인공이 보는 눈 앞에서 이 세상의 모든 전화기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주인공은 여자친구와의 모든 추억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사자는 또 다시 제안한다. 하루를 더 살겠냐며. 그렇게 주인공에게서 ‘전화’에 이어 차례대로 하루를 연장해주는 대가로 ‘영화’와 ‘고양이’를 없애려 한다. 전화에 이어 영화와 고양이가 사라지면 또 무엇이 더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부재가 주는 소중함의 의미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일본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판타지적 요소를 통해 사라진 것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사라지고 있는 것도 아닌 완전히 사라진 ‘부재’ 상태가 주는 무게감을 전하고자 감독은 생명 연장을 대가로 하는 극단적인 설정을 한다. 


보통 인간은 무엇이든 손에 쥐고 있을 때 그 소중함을 잘 모른다. 그만큼 그 당연함이 사라졌을 때의 충격은 크다. 물이 다 말라버린 사막에서 물 한 방울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갈 것도 없이 손에 쥐고있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자.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그 날 하루는 오작동의 연속일 것이다. 


영화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인물의 정서를 생각보다 깊게 그리고 있다. 일본 영화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작위적인 연출과 소재에 비해 창의적이지 않은 전개방식이 아쉬울 수는 있으나 이야기와 배우의 힘이 이 모든 걸 상쇄한다. 후반부의 감동은 덤이다.


사라져야 할 것은 없다



소설 <사물들>과 '욜로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할 때 행복감이 커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답은 확실히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질문처럼 반대로 ‘소유하고 있던 것이 사라지면 행복감은 소멸되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갖고있는 재산 따위가 사라지는 개념을 초월한다. 영화는 그 사물들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와 관계가 사라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화가 사라지니 첫사랑과의 추억이 사라졌고, 영화와 고양이가 사라지면 또 여러 추억의 편린들이 사라질테다.  즉 사물들의 사라짐은 단순한 행복감의 상실을 넘어 나 자신의 인생이 소멸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루는 시한부 인생이 결정된 주인공이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영화광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영화를 한 편 봐야한다면 무엇을 봐야할지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친구는 단호히 그런 위대한 작품은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에 나오는 대사를 덧붙인다. 


“좋은 이야기와 말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살만하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사물들 중 무엇이 더 소중한지, 무엇이 가장 뛰어난지는 정할 수 없다. 그저 각자의 사물들에 담긴 이야기가 다를 뿐이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로 우리는 오늘 하루도 살아간다. 지금 한 번 자신의 사물들을 둘러보자.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있는가. 누가 떠오르는가. 모두 다 소중한 나의 이야기다. 사라져야 할 것은 없다. 그 이유만으로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탄핵심판 생중계를 보며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