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16]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 보는 일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지의 여부를 TV 생중계로 보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 지금까지 70년이 채 안 되는, 짧다고 하면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우리들은 탄핵이란 단어를 두 번이나 봤다. 최초 2004년의 탄핵심판청구는 기각되었고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다.
하지만 13년 뒤의 유사한 상황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온 국민이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TV 앞은 탄핵을 지지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양분되어 폭풍전야에 접어들었다. 생중계가 시작되었다. 그 TV쇼의 주인공은 한 여성 재판관이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판결문을 읽었고 엄중한 목소리로 결정적 한 마디를 읊으며 쇼를 마무리했다. 결국 2017년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헌법의 명령에 따라 임기를 다 채우지 못 한 채 ‘전(前) 대통령’이 되었다.
영화 속 명대사와 겹치는 그녀의 한 마디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여 분간 진행된 탄핵판결문 낭독 시간 중 가장 결정적인 한 마디였다. 헌법재판관 8명의 전원 일치 판결이었다. 이 장면에서 문득 영화 <반지의 제왕> 중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반지의 제왕>은 영국의 작가 J.R.R.톨킨이 1950년대에 출간한 3부작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 소설의 상징이자 바이블이 된 이 작품은 2001년 영화감독 피터 잭슨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영화 역시 ‘반지 원정대’ ‘두 개의 탑’ ‘왕의 귀환’이란 부제를 가지고 3부작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2003년에 개봉한 3편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7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을 석권했고 역대 최다 부문을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며(이는 <벤허> <타이타닉>과 타이 기록), 총 러닝타임이 9시간에 달하는 대서사시의 방점을 화려하게 찍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어느 날 삼촌으로부터 우연히 반지를 하나 물려받는다. 그 반지는 세월의 흐름을 막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등 초인적인 힘을 여럿 가지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그 반지를 ‘절대 반지’라고 부른다. 그 반지는 이야기 상 절대악에 해당하는 세력이 만든 것인데 그들은 잃어버린 반지를 다시 되찾으려 한다. 반지의 위험성을 안 주인공은 반지의 파괴를 위해 결사단을 구성한다. 그 결사단이 ‘반지 원정대’다. 1편은 반지 원정대가 모이게 되는 이야기를 설명하고 2편의 중간 과정을 거쳐 결국 3편에서는 원정대가 악의 세력과 싸우며 반지를 없애는 과정을 담아냈다.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3편 속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사와 장면이 있다. 반지원정대 세력과 절대악 세력의 전쟁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다. 악역 세력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나즈굴’이란 악령이 등장해 자신 앞에 서있는 투구를 쓴 인물에게 한 마디를 읊조린다.
“No man can kill me”(인간은 날 죽일 수 없어)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인물은 투구를 벗으며 한 마디를 외치고 그를 처치한다.
“I am no man"(난 남자가 아니다)
이 장면이 왜 흥미로울까. 이는 영어권 문학에서 자주 쓰던 언어유희(wordplay)에 해당하는 대사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man이란 단어는 남성이란 뜻 말고도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즉, 영화 속 "No man can kill me"란 대사는 악령인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상대는 투구를 벗고 “I am no man”이라고 하며 그에게 칼을 꽂는다. 투구를 벗은 인물은 ‘에오윈’이란 공주였다. 그녀는 “I am no man”이란 대사에서 man을 사람이 아닌 ‘남자’로 사용하며 악역의 대사에 응수를 한다. 그녀는 사람으로서가 아닌, ‘여자’였기에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의 여성이 매우 강력한 인물을 물리치는 결정적인 이 장면에서,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하는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총칼보다도 존엄하고 위대한 헌법의 명령으로 그녀 역시 절대 권력에 가까운 인물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맥베스>에 대한 오마주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위 장면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을 인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맥베스>의 결말부에서 맥베스는 자신을 죽이려는 맥더프를 앞에 두고 외친다.
“I bear a charmed life, which must not yield to one of woman born."
(나는 마법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에게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맥더프는 “Despair thy charm. And let the angel whom thou still hast served tell thee: Macduff was from his mother's womb untimely ripped." (그런 마법은 단념하여라. 그리고 네가 항상 섬겨 왔던 악령이 맥더프는 제 어머니의 배를 때 이르게 찢고 나왔다고 네게 일러주도록 하여라)라고 한다.
맥베스는 작품 속 마녀들의 예언에 따라 여자가 낳은 자에게 왕위를 뺏길 일은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을 한다. 즉 그 누구도 자신을 위협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맥더프는 제왕절개로 태어난 인물이었고 여자가 낳았다기 보다는 꺼내졌다는 의미가 부여되어 그 말에 위배될 수 있었다. 그렇게 맥베스는 최후를 맞는다. <반지의 제왕>은 <맥베스>의 이 장면을 영화 속에서 매우 적절히 활용했다. 맥베스는 작품 속에서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다. 그 부당한 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결국 권력에 눈이 멀어 왕권을 유지한다. 하지만 종국에는 정의의 심판을 받는다. 이 부분 역시 파면된 한 지도자가 겹쳐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제 현실도 영화처럼
물론 이정미 권한대행의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된 것은 아니기에 영화 속 장면과 그녀의 판결문 낭독을 동일시하는 것에는 비약이 있다. 하지만 영화나 현실이나 모두 결국 ‘사필귀정’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절대적이고 압도적으로 강력하다고 해도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것을 영화의 관객들과 TV 중계를 본 국민들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제 3월 10일의 대국민 TV쇼 주인공은 임무를 다하고 명예롭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떠났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해야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는 듯하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은 임무들이 있지만 우선 큰 산을 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둔다. 영화에서도 반지원정대는 수차례 높은 산맥들을 넘어가며 악의 세력을 물리쳤다. 그리고 온 세계는 평화를 맞이했다. 이제 우리의 현실도 그 결말을 따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