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4] <컨택트>
* 이 글은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읽지 않으시는 게 더 좋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엽적인 해석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 엄청나게 신선하다. 전에 보지 못한 SF 영화가 등장했다. 기존 외계생물이 지구에 등장하는 영화를 떠올려보면 보통 대부분의 영화들이 외계인과 인간의 대결구도를 그린다. <에일리언>,<프레데터>,<화성침공> 등을 비롯 <맨 인 블랙>,<인디펜던스 데이>,<디스트릭트 9> 등 인류는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과 맞서 싸워왔다. 이번 겨울 극장가에는 또 다시 전혀 보지 못 했던 비행물체가 날아왔고 인류는 새로운 유형의 외계인과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외계로부터 날아온 비행물체들이 나타났다. 미국은 물론 중국,러시아,베네수엘라,시에라리온 등 세계 곳곳에 나타난 비행물체들로 인해 전 지구적 혼란이 초래됐다. 불시착이라기엔 뭔가 목적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어학자(에이미 아담스)와 물리학자(제레미 레너)는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지와의 조우를 시작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 그들에게 지구의 운명이 달려있을 수도 있다.
신선한 언어학적 접근
이 영화가 전에 없던 새로운 SF 영화라고 전술한 이유는 비행물체나 외계인의 생김새가 새로워서 뿐만은 결코 아니다. 기존 영화에서 외계인이 등장하면 그들은 이유불문 배척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들과 전투를 하지 않는다. <우주전쟁>과 같이 도시를 파괴하는 외계생물체와 맞서 싸우는 류의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컨택트>가 다소 아쉬웠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들과 싸우기에 앞서 그들이 지구에 왜 왔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군인도 경찰도 아닌 언어학자가 주인공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셸’이라고 불리는 비행물체는 18시간마다 바닥이 열리고 그 때 인류는 셸 속의 생물체들을 만날 수 있다. 주인공인 언어학자와 물리학자는 그들과 조우하게 되고 처음 보는 시각적인 충격에 의해 작업의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 한다. 다시 그들과 만난 언어학자는 방법을 모색하고 결국 그들에게 우리의 언어를 가르쳐서 대화를 시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큰 문제점에 봉착한다. 그들과 우리의 언어(영화 속에선 당연히 영어)의 인식체계가 완전히 다른 것을 알게된다. ‘헵타포드’라 불리는 영화 속 외계생물체들은 표의문자를 사용한다. 표의문자란 소리가 아닌 문자에 의미가 담긴 언어다. 이를테면 한자와 같은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인류의 언어 사고 체계는 ‘선형적’이다. 즉 우리는 시간도 순차적으로 이해하고 단어의 사용도 쓰는 순서를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문장의 과거,현재,미래 시제의 구분이 있는 것도 그 이유고 나라마다 문법 체계가 다르지만 영어를 예로 들면 주어-동사-목적어의 순으로 쓰고 말을 해야만이 소통이 가능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헵타포드의 언어는 ‘비선형적’이다. 영화에서 보면 그들의 언어는 손으로 추정되는 몸의 한 부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그려내는 일종의 그림이 대신한다. 그 그림은 원형으로서 나타나는데 우선 매 문장이 다른 그림이고 원형이라 문장의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다. 점점 일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인과론적 체계와 목적론적 체계
감독이 심어놓은 언어 체계의 차이를 이해해야만이 이 영화의 모호한 교차편집이 왜 이뤄졌나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고서는 영화 속 주인공의 과거 또는 환영으로 묘사되는 장면들이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즉 인간은 선형적인 사고를 하므로 모든 인식을 원인에 따른 결과로 해석하게 된다. 반대로 영화 속 헵타포드는 목적론적 체계를 가지고서 시간성을 초월한다. 순차적인 원인과 결과가 아닌 결과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결국 헵타포드는 과거와 현재,미래를 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 과정으로서 한 번에 인식한다. 이 인과론과 목적론의 차용은 영화의 원작 소설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페르마의 원리’를 다루는 것에서 나온다. 영화 이해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원작 단편소설을 꼭 읽길 추천하는 바이다.
또 하나의 개념 사피어-워프 가설
참 어렵게도 여러 개념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언급된 개념들을 선행해서 봐야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이 글의 목적은 영화를 다 본 관객의 이해도를 더 높이기 위함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인간과 헵타포드는 언어도 다르고 사고 체계도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주인공은 변화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쓰여지는 개념이 ‘사피어-워프 가설’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언어학적 가설이다. 즉 주인공인 언어학자 루이스는 헵타포드와의 만남을 가지며 그들의 언어와 사고체계를 이해하고 습득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헵타포드어를 인식하게 되며 세상을 비선형적이고 목적론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의 모든 실마리를 풀게 된다. 계속해서 교차편집 된 딸과의 추억으로 보이는 장면들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었고 과거 회상(이젠 그게 과거가 아님을 알 수 있음)에 나오진 않지만 과학자 남편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함께 헵타포드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게되며 중국의 솅 장군의 마음을 돌려세워 헵타포드와의 전쟁도 막게된다. 이로서 영화의 모든 연결고리가 이어졌다. 스포일러에 대한 경고를 미리 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드니 빌뇌브와 에이미 아담스
이 영화는 우선 뛰어난 원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짧은 단편의 내용을 가지고 2시간 동안 설득력있게 내용을 구체화시킨 각본의 힘에 감탄했고 이를 어떻게 시각화시킬까를 고민한 착상부터 결국엔 실현시킨 감독 드니 빌뇌브에게 두 팔 들어 항복했다. 드니 빌뇌브는 <그을린 사랑>과 같은 드라마도, <에너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와 같은 스릴러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명감독의 리스트에 본인이 올라갈 것을 미리 알렸고 이번 <컨택트>로 관객들에게 확약을 얻게 됐다. 그가 <블레이드 러너>의 후속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연출한 부분에 대해 원작의 팬들이 우려보다도 기대를 하는 것에서 이미 우리는 드니 빌뇌브의 힘에 믿음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먼저 개봉한 <녹터널 애니멀스>에 이어 <컨택트>까지 주인공의 연기력이 한 작품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에이미 아담스는 완벽하게 보여줬다. 2월 26일에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기대하는 것도 과장은 아닐테다. 물론 <재키>의 나탈리 포트만과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라는 강력한 후보들을 넘어야 하지만 가능성이 결코 낮은 연기가 아니었다. 흔히 알짜라고 부르는 주요 5부문(작품상,감독상,각색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에 <컨택트>도 여럿 후보를 올린 상태다. 과연 얼마나 수확을 거둘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새로운 걸작의 탄생
멀리 갈 것 없이 2010년대의 대표적인 SF 영화를 꼽자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 <인터스텔라>가 떠오르겠다. 지금 우리는 그 반열에 함께 올려도 전혀 무방한 새로운 걸작이 극장에 걸려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의 걸작을 되새기는 기쁨도 크지만 동시대의 걸작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보다 큰 기쁨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