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5] <동주>
“시를 쓰기만 하면 뭘 하니 발표를 해야지”
“당선이 아이 됐는데 발표를 어찌케 하니”
영화에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자 가장 가까운 친우이기도 했던 송몽규는 함경도 사투리로 정겹게 동생 동주에게 시를 발표해 볼 것을 제안한다. 자신보다 앞서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촌형을 바라보는 동주의 표정은 부러움 반 부끄러움 반. 여러모로 복잡하다.
다행히 우리는 습작으로만 남을 뻔 했던 그의 시를 읽게 되었다. 1946년 윤동주의 또 다른 지우인 강처중과 정병욱에 의해 그의 시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국 현대 문학사의 거룩한 발자취로 남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아쉽게도 시인 본인은 자신의 시집을 보지 못 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45년 2월 16일. 6개월만 더 버텼더라면 그토록 염원한 조국의 광복을 볼 수 있었을텐데 일제 치하의 잔인무도함 아래 파리한 민족의 시인은 눈을 감았다. 내일은 그의 72주기가 되는 날이다. 동시에 올 해 정유년은 1917년에 태어난 그가 100돌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이에 맞춰 극장가는 1년 전 개봉했던 영화 <동주>의 재개봉을 준비하며 우리 가슴 한 켠 남아있는 시인을 다시 추억하기에 이른다.
감독이 시인을 대하는 방식
연출을 맡은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 <소원>과 같은 작품을 통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동주>를 개봉하기 전 2015년 후반에는 충무로 최고의 티켓파워를 가진 배우 송강호와 2015년을 자신의 해로 만든 유아인을 등장시켜 <사도>를 선보였다. 영조와 사도세자라는 두 슬픈 부자간의 비극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힘도 좋았지만 배우들의 스타 파워를 앞세워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기는 흥행 성적을 거뒀다.
탄력을 받은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서도 그 흥행 가도를 이어갈 수 있는 방식을 꾀할 수 있었으나 이번엔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다. 위대한 민족시인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영화의 광고 예산도 잡지 않고 총 제작비 6억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유아인이 윤동주의 역할을 맡고 싶어했지만 감독은 대세 스타를 캐스팅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거절했다는 후문도 있다. 감독은 윤동주라는 시인이 오롯이 조명되게끔 하기 위해 이름값과 규모를 포기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관객들에게 시인 윤동주라는 인물과 그의 진정성을 더 효과적으로 전해줬고 강하늘과 박정민이란 보물과 같은 배우들도 알게해줬다.
충무로의 새로운 기대주
스타 배우의 기용을 포기한 감독은 강하늘과 박정민이란 배우를 관객에게 소개시켜줬고 그 둘을 통해 관객들은 충무로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두 배우 모두 이 영화가 처녀작은 아니었지만 이 작품을 통해 자신들을 확실히 알리는 계기를 가졌다.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은 매한가지이나 기질적으로 성격이 달라 생각의 차이를 보이는 두 사촌지간을 연기함에 있어서 두 배우가 보여주는 합은 훌륭했다. 신념을 위해서 무엇이든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불같은 역할의 몽규는 동주에게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은 존재다. 배우 박정민은 그런 몽규의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에너지를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한다. 불과 87년생의 배우가 신인의 것이 아닌 노련함까지 선보이며 영화의 주인공이 동주가 아니라 몽규가 아닌가라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사실 <파수꾼>에서 그의 연기를 미리 봤던 관객이라면 놀랐기보다는 이제 박정민이란 배우에 대한 기대가 확신으로 바뀌었을 순간이었다. 결국 박정민은 작년 청룡영화제에서 신인남우상을 받았고 <동주>를 본 관객이라면 머지않아 남우주연상을 받을 배우의 예고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가졌을테다.
동주와 같이 몸으로 뛰며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절망의 역사 속에서 시를 쓰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동주는 파리하고 조용하지만 울림이 있다. 배우 강하늘은 그런 동주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했다. TV 드라마 <미생>과 <상속자들>의 엘리트같은 모습부터 영화 <스물>의 재기발랄한 역할을 소화하며 영역을 넓혀가던 강하늘이 연기할 때의 눈빛은 항상 진지했다. 그 진지한 눈빛이 결국 그를 동주 역할로 이끌었다. 또한 실제로 미남이었던 윤동주 시인처럼 강하늘 역시 깨끗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면 강하늘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었다.
다시 읽는 참회록
주옥같은 시인의 대표시들이 영화 곳곳에서 강하늘의 내레이션으로 읊어진다. 영화를 다시 보며 시인의 시를 통해 절망적인 조국의 그 날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게 된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동주는 몽규와 함께 창씨개명을 하게된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히라누마 도주’란 이름을 얻게 된 동주는 밀려오는 굴욕감과 슬픔을 읊는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동주는 몰락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치욕감을 느낀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가 치욕적인게 아니라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살며 나라의 몰락을 상관하지 않으며 살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 하는 자신의 모습에 시인은 욕지기를 느꼈을테다. 결국 시인은 밤마다 자신의 얼굴이 비친 거울을 닦으며 스스로 성찰한다.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거울 닦기’를 계속하며 시인은 스스로 참회하고 조국의 광복을 기원했다. 그를 지켜보는 우리들은 조국의 독립은 아니어도 각자의 거울을 꺼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을 한다.
별 헤는 밤의 청춘
옥중에서 창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별빛을 보며 동주는 그리움의 이름들을 불러본다.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쓸쓸함,동경을 느끼며 자신의 시와 어머니를 불렀다. 무너진 조국의 상황으로 자신의 눈 앞에 두지 못 하는 그리움의 대상들을 별 하나하나에 아로새기며 시인은 밤을 지샜다. 동시에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자신의 무덤 위에도 푸른 잔디가 피어날 것을 얘기하며 죽음 앞에서도 초연히 자신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한 청춘의 고백에 먹먹함을 느끼게 된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영화를 통해 100돌이 지나도 아직 다하지 않은 영원한 청춘의 시를 다시 읽으며 고개 숙여 감사함을 표해본다. 이 겨울도 곧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더욱 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가슴에 품고 싶은 그런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