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방 서랍장 위에 있는 두 번째 그림
의지나 의욕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가 달랐다.
대낮이었다. 쿵 콰앙 쿠우 콰 쾅.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나의 조그만 방 미닫이문 사이로 위태롭게 들려왔다. 그 엇박자에 맞춰 화가 쿵쾅거렸다. 당신이 나를 불러 앉혔다.
눈동자는 기껏해야 둘이건만 일렁거리는 눈빛은 사방으로 흘러 당최 무엇을 바라보는 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끓었다. 당신의 취한 일상이 반복된 이래 마주앉은 적이 있었나, 아빠다리가 몹시 불편했다.
한껏 꼬여있는 혀가 영락없는 주정꾼이었지만 내뱉는 말에는 어쩐지 술냄새가 나지 않았다. 한껏 부푼 목소리였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조종사가 되겠다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목소리처럼 그의 몇마디들이 방 안을 비행했다. "아빠, 전시하기로 했다!"
시청과 약속이 되었다고 했다. 며칠 전, 아빠의 조카 그러니까 나에게는 사촌형이지만 늦둥이인 아빠와 터울이 크지 않은 사촌이 다녀갔다. 엄마는 아마 그가 허풍을 불어넣었으리라 내게 슬그머니 얘기했다. 그림이 못나서가 아니라 영문을 몰라 당최 믿을 수 없었던 확신, 그가 몇번이고 쓰러지는 동안 가족 중 누구에게도 전시와 관련된 연락은 없었다. 당연히 지금까지도.
놀라웠다. 그에게 남은 의지가 있었다니. 당신을 잔인하게 바라보던 아들을 붙잡았던 건 분명 열렬한 의지였다. 또 순수한 의지였다. 옅은 햇살이 당신과 나 사이에 들어와 떠다니는 먼지들을 비추고 있었다. 몽롱한 눈과 꼬여진 혀에서 선명한 마음을 봤던 날, 취해있던 당신을 간직하고 싶은 단 하나의 순간이다.
1. 무제
계절의 접시 :
CD 크기만한 접시, 그 안에 계절이 있다. 풍경이 있다. 가만히 바라보면 곧 아름답다. 조금 더 가만히 바라보면 그림은 추억이 된다. 접시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풀잎들이 살랑거린다. 마음이 간지럽다. 이내 시점이 바뀌어 계절을 바라보는 그가 보인다. 나긋한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추억이다.
당신도 나만큼 젊었을텐데. 허황된 꿈이 있었을텐데. 뜨겁게 달아오르고 힘없이 식었을텐데. 꾹꾹 누른 편지를 썼을텐데. 달렸을텐데. 울었을텐데. 크게 웃었을텐데.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믿었을텐데. 그 두근거림으로 밤을 지새웠을텐데.
바람소리가 잦아든다. 나는 다시 내가 된다. 당신의 세상도 참 아름다웠겠구나. 당신의 젊음도 참 뜨거웠겠구나. 그것을 그리는 당신의 손이 보고싶어졌다. 당신의 추억에 다녀왔다. 계절을 담은 접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