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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갈빵 Aug 19. 2022

스타크래프트 : 홍콩록

패배의 공기. 무겁고 탁하다. 짜증이 치민다. 침착하려 애쓰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코 달린 가슴이 씩씩- 콧김을 내뱉는다. 새벽 1시, 홍콩록에서 완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가슴이 꼭 그랬다. 홍콩록은 과거 스타리그 최대의 라이벌전 임진록을 오마주한 친구와 나의 매치 타이틀이다. 친구가 홍, 내가 공인데 콩. 임진록도 그렇고 홍콩록도 그렇고 왜인지 뒤에 쓰여진 이름의 게이머가 열세이다. 홍진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막상 그가 들으면 께름칙할 수도.


PC방 가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글쎄, 이해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게임을 못해서. 나도 소싯적엔 PC방 꽤나 들락날락하는 초딩이었다. PC방 주인 아저씨가 키보드 벅벅 긁던 시절. 남은 시간 5분이라는 알림에 카운터로 우르르 달려가 서비스 달라 애원하던 시절. 컵라면 좀 빨던 애가 PC방을 끊게 된 건 왜일까? 커가며 관심 둘 곳이 많아진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게임이 경쟁이기에 더 그랬다. 뛰는 나 위에는 꼭 날아다니는 이가 있었다. 패배의 공기가 거북스러웠다. 승리의 쾌감을 얻기 위해 패배의 실망을 담보하기 싫었다.


자, 모순. 팀플레이는 곧잘 참여했다. 헌터 3:3이나 로템 2:2같은 팀플 매치. 방 제목 앞에 '왕초보'까지 붙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전략을 의논할 팀원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의지할 대상이 있어서인가. 보다 마음 편한 전투였다. 결국 GG를 쳐도 그건 '우리'의 패배이지, '나'의 패배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화딱지가 부글부글 끓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패배에 있는 게 아닌데?


쓰다보니 알았다, 난 '나'를 들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야 말이 된다. 스타크래프트는 지독한 수 싸움이다. 상대방의 수를 읽어 기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동시에 내 수를 이리저리로 굴려가며 적을 물리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난 그게 싫었다. 수가 읽히는 것.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 내 생각이 패배하는 것. 스타크래프트는, 정확히 말해 1대1 개인전은 나라는 사람을 들키기 딱 좋은 취조실이었다. 그 취조실을 채운 공기는 갑갑했다. 게임 밖에서도 같았다. 속내가 들킬 때면 붉어지는 내 얼굴이, 씩씩대는 내 가슴이 싫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 '감춤' 혹은 '속임'에 의한 결과라는 걸 깨달을 때 또 한번 내가 싫었다.


너무 갔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 얘기하자면, 수 싸움 알레르기가 있는 내가 왜 홍콩록에 몸을 던졌을까. 처음엔 향수였다. 감성이었다. 군것질 싫어하는 내가, 괜히 네거리사탕을 보곤 저 옛날이 생각나 하나 입에 넣어보는 것처럼. 그런 류의 맛보기였다. 너 하나 먹자 나 하나 먹자하다 서로 신나 우리의 게임이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두어번만에 깨달았다. 이 전투가 부담스럽다라는 것을. 그 이유는 오늘에서야 알았지만, 과거의 내가 느꼈던 회피의 감정들이 선명하게 현재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하나 변한 게 있었다. 부딪혀보고 싶었다. 너 지금 드라마 찍냐 하겠지만, 내심 도전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니까. 승패는 3대7 정도로 많이 밀렸다. 물론 분했지만 어쩐지 괜찮았다. 그리고, 얘라서 괜찮았다.


홍콩록의 홍은 근래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다. 여러 이유가 많지만 개중에 하나는 나를 드러내도 괜찮다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여러 이유가 많지만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결과적으로 홍을 상대함으로서 까발림을 단련했다.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나에게로 한 발자국 나아간 셈이다. 드러내도 좋고 들킨대도 괜찮은 정신의 근육을 키웠다. 거울 보고 폼잡는 나만 보이는 펌핑 정도. 자칫하면 근손실이지만 이 글을 단백질 삼아 유지해야하지 않겠나. 덧붙여 게임적 측면에서 봤을 때도 무던한 내 스타일과 달리 변칙과 전략을 난무하여 나를 당황시키니 이 또한 단련의 연장선이었다. 수를 제대로 배웠다. 좋은 적수였다.


이 작은 게임의 승부를 현실까지 끌고 들어온 것에 대해 머리를 긁적거릴 홍일 수도 있다. 나도 몰랐다. 패배의 분함을 토로하며 우주전쟁에서 퇴각하겠다는 백기를 들어보이려 했던 것인데 어쩐지 자아성찰이 되어버렸다. 산으로 갔지만 오히려 좋다. 내가 우주전쟁에서 벗어나고자함은 패배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하산이다. 배움을 마치고 단단해진 제자처럼 하산하련다. 고맙다 사부. 그리고 더 큰 세상을 향해이 몸뚱아리 하나 내던져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 PC방 갈 일은 없겠다. 백수라는 종족으로 구직 크래프트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 부지런히 채용 공고를 정찰하고 타이밍 러쉬에 나가야 하며 수틀리면 한방 병력을 모아야한다. 하, 다시 보니 이 글은 서른살 백수의 스쳐가는 취미를 까발리고 살짝쿵 던져보는 일종의 출사표다. 취업은 앞마당, 먹어야 인생이라는 게임이 풍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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