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앞에 가성비
대표적으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깨뜨린
향유를 돈의 가치로 계산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 드린 가치를
평면에 놓아두고 평가한다?
얼마만큼의 가치인가?
그래서 과부의 두렙돈을
이 기준으로 폄하할 때는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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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마음에
은혜가 넘쳤을 때는
드렸던 모든 시간이 값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황폐하거나
은혜가 식으면
교회에서 보낸 수고와 헌신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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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한
시간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시간당 얼마로 노동의 비용이
측정되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빼버리면 종교생활만 남는다.
교회 안에 머물면 머물수록
허비와 손해로 계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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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복잡해지지만 단순하다.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가?
눈앞에 사람을, 문제 많은 교회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수고는 계산하게 되지만
그 너머에 하나님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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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누구신가?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 같다는
말씀처럼, 밭을 보느냐, 그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계산되어 지지 않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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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왕은 하나님이 내린 명령을
세속적 가치와 뒤섞었다.
영원을 평면에 늘어놓고는
가격대 성능비로 순종했다.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명령에 순종해서
진멸했다. (삼상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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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셈에 빨랐지만
그 너머를 보는 지혜가 없었다.
가나안에 입성할 때 아간이 범한
탐욕과 유사했다는 사실을
사울은 알지 못했을까?
블레셋의 전투, 무모한 금식 명령 등
이미 몇 차례나 실수했던 사울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또 한 번의,
그러나 마지막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