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동지)
아침부터 어머니는 분주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계셨다. 며칠 전 주방에서 가족 식사를 준비하던 도중 떨어진 도마에 발등을 다쳐서 여태껏 미뤄온 병원을 가기 위해서였다. 출근 전 나는 어머니의 병원 가는 길에 동행하기로 하였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신 후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시간이라 바쁠 것을 예상했지만 반대로 평일이라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되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병원을 나오니 시간은 11시 30분 정도 되었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 시간 정도 잠을 청한 후 식사를 가볍게 하고 출근하면 늦지 않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죽집을 들리자고 말씀을 하셨다. 전 날 조카를 데리고 본가에 와서 하룻밤을 묵었던 둘째 누나의 동지죽이 먹고 싶다는 말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동지날이었다. '동짓날'은 동지죽을 먹는 날로 예로부터 동지죽을 먹음으로써 액운을 쫓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날이었지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동네 몇 군데를 한참 돌고 난 뒤 죽집을 찾지 못하고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전에는 이쪽 근방에 잘되는 죽집이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장사가 안돼서 그런지... 없어졌구나."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배달이 되는 곳이 많잖아요. 집에 가서 동지죽 시켜 먹을 만한 가게 찾아볼게요."
집에 돌아오니 누나가 동지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본 후 실망이 이만저만 아닌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방에 들어가 부족했던 잠을 청했다. 당연히 동지죽 배달을 알아본다는 것을 깜빡한 채로 이불 속에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묵묵부답이자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나를 부르셨다.
피곤한 상태에서 어머니 재촉을 들으니 서운한 감정이 폭발했다.
"곧 있으면 출근해야 되는데, 꼭 동지죽을 먹어야겠어요."
"좀 있어보세요. 찾아볼게요."
그러나 동지죽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죽집마다 배달은 안되고 직접 가서 먹거나 포장 정도만 가능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배달이 안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어느샌가 어머니는 밥솥에 팥을 삶고 계셨다.
"꼭 나가서 사 먹을 필요 있겠니.?"
"그냥 집에서 만들어 먹자꾸나."
여유 없는 시간에 쪽잠을 자고 출근을 하려니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시집간 누나들 그리고 각자 일 때문에 출가한 형과 동생이 없는 본가를 지켜야 한다는 아들이지만 오늘만큼은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어머니와 누나는 연신 괜찮다고 하면서 출근하는 나를 배웅해주었다. 혹여나 동생이 그리고 아들이 죄송한...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나 보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냄비에 동지죽이 가득 담아져 있었다. 퇴근을 하고 배고픈 모습을 보셨는지 어머니는 동지죽 한 그릇과 동치미를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으셨다.
"퇴근하고 배고플 테니 동지죽 먹고 쉬렴."
동지죽을 먹으면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과거 회상을 하셨던 어머니는 1999년 12월 20일 전남대병원에서 아버지의 1차 대동맥 수술이 끝나고 4일 뒤 깨어나신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날 너희 아버지가 수술이 끝나고 4일 뒤에 눈을 뜨셨단다. 공교롭게도 그날 동짓날이라 고모는 동지죽을 만들어 오셨지만, 큰 수술한 환자가 어떻게 동지죽을 먹겠냐며 생각을 했었단다."
"시간이 지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모가 동지죽을 가지고 오신 것도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옛날에 너희 아버지 돈 잘 벌고 남들 앞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갈 때, 그때는 여태껏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놓치며 사셨더란다."
"그때 가족들과 식탁에 함께 앉아서 동지죽을 먹을 생각이나 했었겠니.?"
"크게 아프고 난 후 지금에서야 가족들과 그리고 너희와 무엇이든 함께 하려고 노력하신단다."
"그러니 너도 젊었을 때 건강 챙기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잠깐이라도 스스로 돌아보거라."
어머니와 대화를 마치자 어느새 동지죽이 가득 담겨있던 그릇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어둠이 깊게 드리운 조용한 밤, 누워서 잠들기 전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태껏 열심히 산다고 했지만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있지 않았나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차라리 후회라도 하지 않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을 어떻게 하리오. 내 곁을 지켜주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주변에 소중한 존재들 그리고 따뜻한 정을 잊지 말자.
추운 겨울, 눈과 바람을 막고 목을 따뜻하게 감싸기 위해 우리는 '목도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이 지나면 한쪽 서랍장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잊히게 됩니다. 혹여나 우리는 그런 소중한 그리고 소중했던 존재를 잊고 있지는 않나요?
동지죽으로 인해서 무엇이 소중한 지 새삼 깨닫게 된 날이었습니다.
다산 다난했던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서 모두가 힘들었던 2021년이 지나갔습니다. 2022년에는 모든 분들이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